이승만 초대 대통령 기념사업회와 그의 양자 이인수 씨가 19일 ‘4ㆍ19 혁명’ 51년 만에 희생된 학생과 유족들에게 사과하려 했으나 결국 무산됐다. 4ㆍ19 민주혁명회 등 관련 3개 단체는 사과의 진정성이 없다고 수용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불행한 일이다. 각자 입장이 있겠지만 역사적 공과를 따져 이제 오늘날 대한민국을 부각시킨 실존적 의미를 더 이상 훼손시켜서는 곤란하다.
4ㆍ19 혁명 당시 서울거리는 장기 독재 타도 열기로 가득했었다. 학생과 교수가 거리로 쏟아져나와 참된 민주주의와 측근정치, 독재 종식을 요구했다. 일주일 뒤 대통령은 하야했고 노쇠한 대통령의 눈과 귀를 가렸던 측근들은 일가 자살과 사형 선고로 다시는 이 나라에 민주화 희생자가 나와서는 안 된다는 첫 교훈을 남겼다. 물론 희생자와 유족들에게 이것으로 슬픈 흔적이 지워지지는 않을 것이다. 본인 잘못이든 측근 잘못이든 장기 독재 후유증에 대한 심판은 계속돼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제 51년이 지나 이 박사의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 건국에 진력한 공적을 재평가하자는 기념사업회와 유족들이 사과 표명을 하는데도 이를 진정성 시비로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것은 너무 협량한 느낌이다. 서울 광화문에 건국 대통령 동상 건립을 세우기 위한 전초작업쯤으로 치부하는 것이다. 그렇게 우려할 수 있다. 하지만 동상 건립과 사과 표명은 별개다. 사과는 수용하고 동상 건립은 반대하면 된다. 이승만 박사의 건국과 6ㆍ25 한국전쟁에서의 공적은 우리에게 너무 소중한 자산이다.
‘만일’의 가정이 끔찍하지만 대한민국 건국이 공포된 48년 8월 15일 훨씬 이전, 46년 2월 김일성 독재 아래 북한 전역에 인민위원회를 조직, 이미 단독국가 체제를 갖췄던 북한이 한반도에 인민공화국을 세웠더라면 지금 우리는 어떤 위치에 있을까. 오늘의 북한 실정을 염두에 두어 보라. 이 박사는 이를 막고 남쪽에 자유 대한민국을 건국했다. 농지 개혁으로 농토를 분배하고 의무교육으로 초등학교를 세웠다. 한국전쟁 때는 미국과 유엔 도움을 끌어냈고 국익을 위해서는 반공포로 2만여명을 단독 석방하는 반미 용감성에다가 출신교인 미국 명문 프린스턴대 인맥을 이용한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의 안보 치밀성도 보였다.
건국 초기 혼란한 시기의 12년 집권 폐해와 공적에 대한 평가는 계속돼야 한다. 하나 이 때문에 사과까지 진정성 운운 거부하는 것은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