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74년에 미국에서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던 ‘캐츠 인 더 크레이들’이란 노래가 있다. 해리 채핀이 불러 전미 차트 정상에 올랐던 이 곡은 ‘요람 속의 아이’라는 제목의 뜻이 말해주듯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다룬 노래다. 내용은 4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지금에도 다수의 공감을 살 만하다.
노래 속 아버지는 어린 아들을 사랑하지만 생업에 분주하다. “며칠 전 아들이 열 살이 되었지. 아버지 고마워요, 공 사주셔서. 저랑 같이 공놀이해요. 던지는 거 가르쳐주세요! 난 말했지. 오늘을 안 된단다. 할 일이 너무 많아. 아들은 괜찮다며 걸어나가면서 미소를 잃지 않았어.”
세월이 흘러 아들이 장성했다. 아버지의 아픈 독백이 이어진다. “난 오래전에 은퇴를 했고, 아들은 멀리 이사 갔지. 며칠 전 아들에게 전화를 했어. 괜찮다면 만나고 싶구나. 시간이 나면 저도 그러고 싶어요, 아버지. 하지만 새 직장이 전쟁터고요, 애들이 독감에 걸렸어요. 전화를 끊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어. 아들이 정말 나처럼 성장했구나. 아들이 나랑 똑같이 되어버렸구나!”
자식과의 소통이 흔들리는 것을 공감한 모든 미국 아버지들의 반성을 불렀을 만하다. 자기 자리는 자기가 만드는 것이며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진리를 다시 한 번 확인한다.
자식 입장에서도 아버지, 어머니에게는 나중에 커서 절감하지만 온통 회한과 미안한 마음뿐이다. 저 멀리 진방남의 ‘불효자는 웁니다’까지 가지 않더라도 1993년 이승환의 노래 ‘내 어머니’로 충분하다. “내 어머니 당신께 죄송스런 맘뿐이지만 아직도 난 당신께 투정만 부리고 있군요.”
스승과의 관계도 사정이 다르지 않다. 우리는 “스승의 은혜는 하늘 같아서 우러러볼수록 높아만지네. 참되거라 바르거라 가르쳐주신 스승은 마음에 어버이시다. 고마워라 스승의 사랑, 아 보답하리 스승의 은혜!” 하는 노래를 학교 다닐 때 열심히 불렀다. 이 노래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가사가 무색하게 중고교 시절 은사와 대학 담당교수님의 안부를 묻는 제자들은 손에 꼽을 정도다.
얼마 전 예닐곱 젊은이와 모인 자리에서 아버지와의 대화가 화제에 올랐다. 놀랍게도 아버지와 거의 대화를 주고받지 않은 학생도 서넛이나 됐고, 전부가 아버지와의 소통 부족을 호소했다. 남북이 대치하고, 동서가 갈리고, 서울 강남 강북이 나뉘고, 좌우와 빈부가 대립하는 것도 심각한 문제지만 그보다 더 큰 갈등, 앞으로 주목해야 할 갈등이 세대 갈등, 즉 젊은 세대 간의 소통부재가 아닐까 한다.
아들 세대가 불안 정서에 휩싸여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어른들은 드물고, 부모의 고통을 헤아려보는 자식도 적다. 서구 팝이나 우리 가요나 부모 자식 관계에 대한 노래가 꽤나 많다. 연인에 대한 노래 다음으로 많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대 소통에 상당한 도움을 주는 것이 바로 음악이다.
한번 부모와 자식이 함께 저녁에 노래방에 가보는 것이 어떨는지. 붐이라고 할 ‘세시봉과 친구들’과 같은 레퍼토리라면 더 즐거울 것이다. 마침 이달은 가정의 달이다. 5월만이라도 가족이 어울려 노래 부르는 달이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