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최북단 섬 연평도. 반년 전인 2010년 11월 23일. 북한은 포 170여발을 이 작은 섬에 쏟아부었다. 겁에 질린 주민들은 섬을 버리고 뭍으로 나와 겨우내 피란민과 다름없는 생활을 했다. 그로부터 6개월이 지났다. 주민들은 다시 섬으로 돌아갔지만 섬 곳곳에는 여전히 당시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포격으로 집을 잃은 주민들은 임시조립주택에서 살고 있다. 39채의 임시주택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모습이 ‘비둘기집’을 닮았다 하여 주민들 사이에선 ‘비둘기집’이라 불린다. 뭍의 사람들은 반년 전 그날의 일을 점차 잊어가고 있다. 하지만 연평 주민들은 반년 전이나 다름 없다. 그들은 아직도 ‘비둘기집’에 산다.
▶전파된 가옥 그대로…복구작업 이제서야=마을에는 당시 전파 된 가옥 잔해가 그대로 남아 있다. 완파된 27가구와 일부 파손된 주택, 창고, 상가 등을 포함해 총 54개 건물을 신축하는 재건공사는 지난 19일 1차 발주 입찰을 실시하는 등 이제야 시작됐다. 옹진군청은 “겨울이 오기 전인 10월 말까지 전 가구 전 세대 완공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입장이지만 주민들의 속은 타들어간다.
김재식 연평도주민대책위원회장은 “반 년이 지났지만 복구된 건 하나도 없다. 철거를 이제 막 시작했다. 복구는 내년이나 돼야 할 것으로 보인다. 또한 ‘반파’의 기준이 마련되지 않아 일부 파손 주택은 지원도 못받고 있다. 몇 년 후에 혹시라도 집이 무너지면 보상받을 길도 없다”고 한탄했다.
비둘기집 살이를 하고 있는 주민들의 삶은 더욱 고되다. 18㎡(5.5평) 크기의 임시주택은 성인 2명이 누워도 어깨를 부딪혀야 할 만큼 비좁다. 김 회장은 “2명 이상은 함께 잘 수 없는 크기다. 집이라도 지어져야 이들이 다시 생업을 이어가며 터전을 잡을 수 있는데…”라며 안타까워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방공호 개선작업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 실정이다. 최두규 연평파출소장은 “방공호를 새로 짓는 계획을 세웠다. 추가로 지을 장소를 물색하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아직 공사 실행은 안된 상태다. 주민들의 출입이 지금보다 용이할 수 있도록 설계 등을 변경하고 있는 중이다. 파손된 주택 복구를 우선으로 하고 그 뒤에 대피소를 개선작업을 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1억 빚져서 조업 다시 시작했는데”…꽃게잡이 흉년=포격 당시 피란길에 오르느라 정상 조업을 하지 못했던 연평도 어민들은 올해 그 피해를 회복하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하지만 지난겨울 유난히 추웠던 탓인지 올봄 꽃게잡이가 영 신통치 않아 어민들은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지난 해까지 꽃게잡이를 하며 생계를 이어오던 김민학(67) 씨는 올해 조업을 중단하고 공공근로사업에 참여하고 있다. 지난 4월 20일께부터 조업을 시작했지만 수익이 평년보다 절반 수준으로 줄어서다. 김 씨는 “평소에 1500만원 정도 팔아야 수익이 남는데 올해는 700만원 정도밖에 벌지 못했다. 그 정도로는 생활을 이어가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정철국(60)씨는 “어구 하나에 1000만원 정도다. 배 한척에 평균적으로 어구 25개가 있으니 그것만 2억5000만원이다. 1억원 이상 빚을 지고 올해 다시 조업을 시작했는데 잘 잡히지 않아 어민들이 죽을 상”이라고 토로했다.
▶ “그래도 우리 살 곳은 이곳뿐”=그래도 주민들은 연평도를 떠나지 않는다. 임시주택에 살지언정 평생 터전이었던 고향을 버릴 수가 없어서였다. 포격의 상처는 그대로 남아 있지만 연평 주민들은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고 있다.
최 소장은 “불안감이 아주 없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예전 같은 두려움은 많이 사라졌다. 포격 이후 얼마 동안은 군부대 훈련이 있으면 다들 대피소로 이동했는데 요새는 그런 모습이 많지 않다”고 말했다.
민박집을 운영하고 있는 최옥선(56ㆍ여)씨는 “지난 3월에 다시 연평도로 돌아왔다. 봄이 되니까 연평도를 찾는 관광객들도 다시 늘어나고 있다. 포격 전 평온했던 일상으로 다시 돌아가고 있다”면서도 “북한 장사정포와 방사포가 포문을 열었다는 뉴스를 들을 때면 덜컥 겁이 나는 건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박수진ㆍ이자영ㆍ문영규 기자/sjp10@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