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대의 승부조작 사건은
축구계 전체가 책임질 일
‘리그 중단’ 비장한 각오로
역사에 남겨야 근절가능
휴일인 지난 29일 새벽, 축구 덕분에 우리는 모처럼 유쾌하고 행복했다. 영국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맨유)와 스페인의 FC바르셀로나(바르샤) 간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이 벌어진 것이다. 지구 반대쪽 남의 나라 축구 잔치에 우리가 밤잠을 설쳐가며 들썩인 것은 박지성 선수 선발출장 때문이다. 이날 결승전 경기 시청률은 6.2%였다고 한다. 새벽방송치고는 대단한 수치다. 국민적 관심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간다.
단지 박 선수 소속팀이라는 이유만으로 맨유를 응원했지만 결과는 완패였다. 하지만 하나 아쉬울 건 없다. 세계 최고 선수들이 펼치는 역동적이고 박진감 넘치는 경기와 한 차원 높은 기술, 상상을 뛰어넘는 창의적 플레이를 즐긴 것만으로 잠 설친 대가는 충분했다. 더욱이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 자랑스런 한국 축구의 간판인 박지성 선수가 있지 않은가.
그러나 그날 오후, 우리는 승부조작 사건으로 만신창이가 된 한국 축구의 또 다른 얼굴을 마주해야 했다. ‘깊이 사죄 드린다’는 현수막이 걸린 그라운드를 선수들은 그 어느 때보다 열심히 뛰었지만 공을 쫓아 이리저리 흘러가는 헛도는 기계처럼 보였다. 경기를 마친 한 선수는 “오직 살기 위해 죽기로 뛰었다”며 눈물 젖은 목소리를 토해냈다. 그러나 이미 관중석은 텅 비었다.
열혈 팬이 아니더라도, 충격을 가누기 힘들다. 지난 2002년, 월드컵 4강의 기적을 일구자 세계는 “새로운 생명과 영혼을 선사했다”고 극찬했던 한국 축구가 아닌가.
그로부터 10년도 지나지 않은 지금, 대한민국 축구는 날개 없이 추락하고 있다. 세계에 감동을 주었던 그 아름다운 영혼을 몇 푼 돈과 맞바꿔버린 것이다.
그야말로 죽기를 각오하지 않으면 한국 축구를 되살릴 수 없다는 사실을 모든 축구인들은 뼛속까지 새겨야 한다. 하지만 그런 각오가 서 있는지 의문이다. 엊그제 강원도 평창 휘닉스 파크에서 열린 ‘K-리그 워크숍’만 봐도 그렇다. 16개 프로구단 전 선수와 임직원, 심판진까지 모여 전문가 교육과 난상토론, 자정결의대회를 가졌지만 사실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반성하고 새롭게 출발하자는 구호로 적당히 넘어갈 사안이 아니라는 것이다.
당장 K-리그를 접어야 한다. 그리고 철저한 내부 정비를 마치고 새로 시작해야 한다. 감시 기구를 만들고 서약을 받자는 제안부터 토토 제도 폐지까지 연일 다양한 치유책이 쏟아지지만 지금은 아무 의미가 없다. 이번 사건의 일차적인 책임은 물론 양심과 영혼을 악마에게 팔아넘긴 일부 선수들에게 있다. 하지만 치명적 암세포를 방치한 축구계 전체가 책임을 함께 져야 한다. 승부조작 의심 선수들의 블랙리스트가 공공연히 나도는데도, 각 구단은 서로 쉬쉬하며 어물쩍 넘어가려다 결국 이 지경이 된 것이다. 그게 이번 사태의 본질이다.
우리 축구는 승부조작이라는 결정적 하자가 있는 불량상품이다. 적당히 포장을 해서 다시 소비자에게 내놓을 생각이라면 오산이다. 시장은 냉혹하고, 소비자는 현명하다. 결코 두 번 속는 일은 없다. 불량품은 전량 폐기하고 신제품을 개발해 시장의 선택을 기다려야 한다. 설령 그 시간이 길어지더라도 그것이 신뢰를 회복하는 지름길이다. 이 과정에서 필요한 것은 각자의 기득권을 모두 내려놓는 것이다.
K-리그 역사에 적어도 2011-2012 시즌은 없어야 한다. 먼 훗날 후손들이 왜 이때 기록이 없냐고 묻거든 아프게 그 이유를 명확히 설명해줘야 한다. 그렇게 역사에 남겨야 교훈이 되고 다시는 이런 추잡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지금부터 시작해도 늦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