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대학등록금은 높지 않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고졸 출신이 겪는 비애에 비하면 그렇다는 것이다. 같은 이유로 대학진학률이 높은 것도 아니다. 절대 수치로도 대표적인 복지국가들인 노르웨이, 핀란드, 호주, 뉴질랜드보다 낮다.
우리나라의 살인적 대학등록금의 원인은 고졸 출신이 누릴 수 있는 삶의 질이다.
이 삶의 질이 너무 낮기 때문에 모두가 과도한 자원을 투여해서 대학을 졸업하려 하는 것이며, 대학들은 이를 악용하여 묵시적 담합을 통해 등록금을 인상해온 것이다.
여기서 정부의 역할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우리나라 노동시장의 본질은 많은 수의 사람들이 저임금 비정규직으로 내몰려야 하는 제로섬 ‘의자앉기’ 게임이다.
대기업 중심 경제체제의 필연적인 결과다. 정부가 이 게임 아이템인 대학졸업장을 따도록 지원해줘야 할까? 궁극적인 해결책이 경제 개혁을 통한 품위 있는 일자리의 창출임은 말할 것도 없다.
물론 경제개혁 전에라도 국가가 국민 각자에게 시장 경쟁의 도구를 마련해주는 것은 어느 선까지는 교육의 공공성에 부합한다.
하지만 시장 경쟁에 투입되는 자원은 이것만이 아니다. 대학을 당장 들어가기 위해서도 서울시 고등학생 1인당 사교육비가 연간 800만원(2011년 3월 17일 헤럴드경제 보도)으로 대학등록금과 엇비슷한 금액이다. 누구도 이 사교육비를 국가가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과연 대한민국의 대학등록금을 ‘사교육비’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물론 대학 교육도 ‘공교육’화될 수 있고 일부 유럽 국가들은 대학 교육도 무상이거나 무상에 가깝다. 하지만 복지는 인간의 행복의 영위에 가장 기본적인 것부터 시작돼야 한다.
이들 나라에서는 대학 교육만이 무상이 아니다. 강력한 고용보험제도가 뒷받침돼 있고 이 ‘사회임금’이 직업의 질의 하한선을 치고 있어 고졸 출신들도 품위 있는 직장을 얻을 수 있다. 즉 대학을 가지 않아 저임금노동을 하게 될 사람들을 위한 배려가 기본으로 깔려 있고 그 위에 대학 교육지원이 이루어지고 있다.
무상보육이나 무상급식과 같은 보편적 복지제도는 행복의 기본요소를 제공하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국민 모두가 수혜자다.
대학등록금 지원은 성적이나 가정형편 때문에 대학에 가지 못하는 18%는 받을 수 없다. 물론 등록금이 낮아지면 이들도 모두 대학에 갈 수 있게 될지 모른다. 하지만 대학교육보다 더 기본적인 행복의 요소들에 대해 같이 지원이 되어야 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하위인 국내총생산(GDP) 대비 정부예산은 물론 늘어나야 하지만 그 돈을 어디에 쓸 것인가. 작년 실업급여 총액이 약 4조원이었다(모성보호급여 제외). 등록금 반값에 필요한 재원은 연간 5조원대다.
물론 GDP 대비 대학교육 지원율이 OECD 평균의 반도 안 되는 0.5%대이고 이를 높여야 한다. 하지만 수혜기간, 수혜자비율, 수혜자격 범위 등에서 OECD 평균에 훨씬 못 미치기는 고용보험도 마찬가지다. 비싼 대학등록금은 우리에게 훨씬 더 비싼 것이 무엇인지 알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