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찍이서 최영걸의 그림을 본 사람들은 한결같이 ‘사진 아니냐?’고 묻는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 보면 화선지에 수묵담채로 그린 회화임을 알게 된다. 노란 산수유의 꽃잎 하나 하나, 작은 돌멩이의 검은 점까지 일일이 세밀하게 묘사한. 품이 많이 들어간 그림이다.
최영걸 작가가 여름의 끝자락에 서울 북촌의 송현동 이화익갤러리에서 작품전을 연다. 3년 만에 열리는 이번 개인전에는 기존 작품 보다 훨씬 더 밀도가 높아진 최영걸의 신작 20여점을 확인할 수 있는 자리이다. 신작은 더욱 세련되면서도 담담해진 필치에, 매력적인 담채를 적절히 곁들여 운치를 더해준다. 그 압도적인 세밀함은 종교적 경외감과 영적 충만감을 느끼게 한다.
서울대 미대 동양화과와 대학원을 졸업한 최영걸은 전통 한국화기법을 현대적인 개념으로 이어가며 자신만의 독특한 화풍을 만들어낸 한국화가다. 흔히들 ’한국화’하면 현대감각과 어울리지 않는 고루한 장르로 여기기 쉽지만 최영걸의 작품은 대단히 사실적이면서도 현대적 세련미를 듬뿍 뿜어낸다. 그는 지난 2005년부터 매년 홍콩 크리스티 등을 통해 세계 미술시장에서 작품성을 지속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크리스티 측은 2005년 이래 한해도 거르지않고 그의 작품을 아시아 현대미술경매에 그의 작품을 올리고 있다. 해외에선 그의 작품만을 수집하는 컬렉터까지 생겨났을 정도다.
작가는 작업을 위해 전국의 산과 들을 누비며 현장에서 고르고 찍은 이미지를 화선지에 먹과 채색으로 묘사한다. 우리 산하의 정취와 기운을 그리기 위해 설악, 섬진강을 즐겨 찾는 그는 똑같은 장소를 계절별로 반복해 찾기도 한다. 그리곤 지난 10년을 도를 닦듯 화폭과 마주한채 연마를 거듭한 필력은 이제 자신만의 독보적인 브랜드를 구축하게 했다.
그의 작업은 동양화 재료와 기법을 사용하고 있으나 서양화에서 보던 빛의 느낌과 그림자의 표현을 구현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동양화와 서양화의 구분은 더이상 무의미함을 느끼게 한다.
전시에 출품된 20여점의 작품은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을 아우른다. 포근한 봄꽃이 핀 산, 계곡을 타고 흐르는 물줄기가 시원스런 여름, 소솔한 가을의 정취, 눈 덮인 겨울산의 풍경을 최영걸 식으로 표현한 것들이다. 특히 이번에는 먹의 농담으로만 그린 ‘청산도의 오후’ ‘마실’같은 작품을 통해 또 다른 변화를 시도하고 있어 주목된다. 이 검은 그림들은 깊은 회화의 맛을 전해준다.
그의 작업은 한 작품을 완성하는데 오랜 노력과 시간이 소요되어야 하지만, 수정이 어려운 동양화의 특성상 때문에 작은 실수로도 작품 한 점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따라서 작품수가 적기 마련.
작가는 "잘 나가는 유명작가들이 팩토리(미술공장)를 차리고, 작품을 찍어내듯 양산하는 시대에 일년에 100호 기준으로 고작 15~20점 정도 완성하는 나는 어찌보면 시대에 뒤떨어진 작가일 수 있다"며 "그러나 일체의 작업을 내 스스로 하는 것이 나의 한계이자, 내 작업의 강점일 수 있다"고 말했다. 자신의 작품을 컬렉션할 이에게, 전적으로 작가의 숨결로 이뤄진 그림을 전하는 게 도리라는 신념 때문이다. 게다가 요즘은 작품의 밀도를 높이기 위해 작품수를 더 줄이고 있다.
미술평론가 하계훈은 "최영걸의 풍경은 세부의 표현과 화면의 깊이, 색채의 정밀성 등이 관람자의 시선을 압도하는 풍경"이라며 "전통적 한국화의 모습과 현대적 풍경화의 표현을 동시에 맛볼 수 있다"고 평했다. 또 "우리 전통 회화에서 지켜온 고원(高遠)-심원(深遠)-평원(平遠)으로 연결되는 삼원법을 현대적으로 응용하고 있는데다, 북유럽 르네상스 화가들의 세밀한 묘사와 풍속 화가들이 갖던 당대의 삶의 모습에 대한 관심, 낭만주의 화가들의 자연에 대한 탐닉과 19세기 인상파 화가들의 햇빛에 대한 관심 등을 함께 읽을 수 있다"고 밝혔다.
전시는 26일부터 9월23일까지.
이영란 선임기자/yrlee@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