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이 주인을 닮았을까, 주인이 집을 닮았을까. 명필름의 심재명(48) 대표는 “집이나 공간은 곧 그 사람의 삶을 보여주는 상징”이라고 했고, “영화는 곧 (만든) 그 사람의 정서와 세계관을 말한다”고 했다. 그 말에 기대자면 이 사람, 목소리를 높여 주장하거나 화려하게 자신을 포장하지 않지만 쉽게 허물어지지 않는 완강한 질서와 미학으로 자신만의 성채를 짓고 있는 사람일 것이 분명하다.
명필름의 한 직원은 “화를 잘 내지 않지만 보도자료에서 맞춤법이 틀리거나 비문을 쓰면 어김없이 지적한다”고 했다. 심 대표는 “시나리오 잘 쓰는 감독이 영화도 잘 만든다”며 “박찬욱, 임상수, 김현석 감독은 글도 좋고 문장과 맞춤법도 정확하다”고 말했다.
심 대표는 1992년 영화마케팅사 ‘명기획’을 설립하고 1995년 ‘명필름’으로 간판을 바꿔달며 제작에 발을 들여놓은 뒤 한국영화의 ‘웰메이드 시대’를 열었다. 200만명을 돌파하며 한국 애니메이션 사상 최고 흥행기록을 세운 ‘마당을 나온 암탉’은 명필름의 30번째 영화다. 명필름의 16년사는 1990년대 중반 이후 한국영화사의 한 페이지가 됐다. 심 대표가 자주 들른다는 서울 광화문 씨네큐브극장과 서촌의 사무실에서 두 차례 만나 살아온 얘기를 들었다.
▶‘집이 곧 사람’… 심재명의 ‘서촌방향’
극장 기획실에서 근무하던 심 대표가 독립해 차린 영화마케팅사 ‘명기획’은 피카디리극장 내 한 귀퉁이에서 시작했다. ‘결혼이야기’의 포스터에 담겼던 홍보문구 ‘잘까 말까 끌까…할까’는 심 대표의 작품이다. 2년여 후 심 대표는 제작사 ‘명필름’으로 간판을 바꾼 뒤 종로구 운니동의 한 오피스텔로 자리를 옮긴다. 당시 강우석 감독이 그곳에서 ‘투캅스’로 흥행에 성공한 뒤 “터가 좋다”는 소문이 나 시네마서비스와 씨네2000 등 몇 개의 영화사가 둥지를 튼 곳이다.
심 대표는 1994년 이은 감독과 결혼한 뒤 옮긴 새 사무실에서 창립작 ‘코르셋’을 내놓았다. 첫 작품 후 명필름 사무실을 종로구 명륜동의 ‘아름답고 오래된 한옥’으로 이사했다. 여기서 명필름의 전성시대가 시작됐다. ‘접속’으로 “한국영화의 새로운 트렌드와 웰메이드 시대”를 알렸고, 시나리오 보따리를 들고 다니던 박찬욱 감독을 만나 ‘공동경비구역 JSA’의 거대한 흥행을 일궜다. 이 성공으로 인근에 사옥을 지었고, 당시 신인감독이던 김지운의 ‘조용한 가족’, 김기덕의 ‘섬’과 임순례 감독의 ‘와이키키 브라더스’ ‘바람난 가족’ 등을 만들며 ‘명륜동 시대’를 이어갔다.
2004년엔 영화계의 흐름을 따라 강남으로 진출했다. 엔터테인먼트 관련 제작사, 매니지먼트사 등이 합종연횡을 거듭하며 주식시장 진출이 러시를 이루던 때였다. 명필름도 ‘태극기 휘날리며’의 강제규 필름과 합병하면서 ‘MK픽처스’를 만들고 투자, 배급, 매니지먼트 분야까지 공세적으로 진출했다. 서울 반포에 있었던 3년간 역시 한국영화계의 한 역사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심 대표는 MK픽처스 이름으로 ‘그때 그사람들’ ‘광식이 동생 광태’를 내놓았다.
MK픽처스 시대는 3년 만에 마감을 고했고, 다시 ‘명필름’으로 돌아온 심 대표는 2007년 종로 서촌에 터를 잡았다. 말하자면 연어의 회귀 같았다. 강북은 심 대표나 남편이자 공동대표인 이은(50) 감독에겐 정서적인 고향이나 다름없다. 이 감독은 종로에서 자랐고, 심 대표는 어린 시절 뚝섬, 휘경동, 면목동 등 당시 서울 변두리를 옮겨다니며 ‘강북 정서’가 몸에 익었다. 심 대표는 지금도 가장 좋아하는 곳으로 광화문을 꼽는다.
심 대표와 이 감독은 용인 수지의 새 아파트에서 결혼생활을 시작해 여러 곳을 다녔지만 결국 평창동에 이어 지금은 사무실과 가까운 누하동에 집을 마련했다. 1층은 심 대표의 아버지, 2~3층은 부부와 딸이 머무는 조그만 빌라다. 중3인 딸 승채와는 한 달에 두세 편 정도 영화를 같이 본다. 추석을 전후로 해선 ‘세 얼간이’와 ‘파퍼씨네 펭귄들’을 관람했다.
“딸과 함께 있는 시간은 절대적으로 부족하죠. 영화일이라는 게 나인 투 파이브가 아니고 지방이나 외국 출장도 많아요. 엄마의 손길이 필요한 나이에 미안한 일이기도 하고 결핍을 느낄수도 있겠지만 딸을 친구처럼 생각하고 좋은 관계예요. 딸이 엄마와 같이 영화 보러 다니는 것을 행복해해요. 딸이 영화일을 한다면 말리진 않을 거예요. 무슨 일을 하든지 마찬가지죠.”
한때 영화사도 강남 사무실, 사람도 강남 아파트로 러시를 이뤘고, 강남이라는 곳은 이제 유행의 첨단, 현대 한국인들의 욕망을 상징하는 곳이 됐다. 영화인들 사이에선 때로 진담 반 농담 반으로 ‘강남 영화’냐 ‘강북 영화’냐, 서울에서 터질 영화냐, 지방에서 대박날 영화냐로 가르기도 한다. 그러나 심 대표의 생각은 다르다.
“강남 영화도 싫고 청담동 문화도 좋아하지 않아요. 서울에서 제일 좋아하는 지역은 광화문이에요. 전통과 역사가 살아 있고 삶과 현실이 느껴지는 공간이지요. 제 개인적 취향이 그래요. 강남 문화가 세련되고 첨단이라는 것에도 동의할 수 없고요. 제가 살 곳이든, 일할 곳이든 한번도 강남을 꿈꿔본 적은 없어요.”
▶‘영화가 곧 사람’
“내성적인 영화를 좋아해요. 외향적인 성격의 주인공이 나온다든가 마초적인 스타일의 작품은 좋아하지 않죠. 예를 들자면 리안 감독의 영화는 굉장히 수줍은 사람들이 자주 주인공으로 나오잖아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작품도 그렇고. 우리 회사가 만든 영화도 마찬가지예요. 예를 들어 멜로나 로맨스 영화를 만들어도 뜨거운 정조나 불치병의 신파가 없어요.”
심 대표는 자신의 성격을 “수줍음이 많고 수세적이며 내성적”이라고 했다. “어린 시절에도 짝사랑만 하고 가슴에 묻어두는 성격이었다”고 했다.
그는 별로 부유하지 않은 가정형편에서 자란 어린 시절, 화가가 꿈이었다. 하지만 미대를 갈 상황은 아니었던 터라 국문학 전공으로 대학(동덕여대)에 진학했다. 미술에 대한 동경 한편에는 영화에 대한 막연한 꿈도 있었다. 초등학교 때 몽고메리 클리프트 주연의 ‘젊은이의 양지’를 본 경험이 강렬하게 남았다. 화가를 꿈꾸던 중학생 시절 모딜리아니의 삶을 다룬 프랑스 영화 ‘몽파르나스의 연인’은 미술과 영화의 꿈이 만난 작품이었다. 대학시절에는 미술관련 이론 및 전공 과목을 모두 듣는 한편으로 영화를 보기 위해 프랑스문화원 같은 곳을 부지런히 쫓아다녔다. 졸업 후엔 작은 규모의 출판사를 4개월간 다녔다. 심 대표는 웃으며 “빡세게 야근하고 똘똘하게 일한 신입사원이었다”고 말했다. 영화계와의 인연은 머지않아 왔다. 일간신문에서 ‘서울극장 기획실 카피라이터 모집’ 공고를 보고 회사 몰래 응시했던 것이 합격이었다. 이후 서울극장과 합동영화사 기획실을 거쳐 명기획으로 독립했다.
명필름 설립은 결혼 이듬해였다. 인생의 전환점과 영화인으로서의 가장 결정적인 계기가 동시에 찾아온 것이다. 90년대 초반 심 대표는 일종의 친목단체였던 한국영화의 젊은 기획자 모임에 참여하고 있었다. 어느 날 서명용지를 든 젊은 감독이 모임을 찾았다. 영화 ‘가슴에 돋는 칼로 슬픔을 자르고’에 대한 영화진흥공사(영화진흥위원회 전신)의 지원 번복 문제를 두고 영화인들의 항의를 담아 연판장을 돌리던 이은 감독이었다. 이 감독은 중앙대 영화학과 출신으로 80년대 중반 이후 독립영화계를 이끌던 진보적인 영화운동단체 ‘장산곶매’의 일원이었다. 광주항쟁을 다룬 영화 ‘오! 꿈의 나라’를 공동 연출했고, 노동문제를 다룬 ‘파업전야’의 프로듀서를 맡았다.
심 대표는 “나는 한눈에 반한 셈이고, 아마 이은 감독은 그렇지 않았을 것”이라고 농담처럼 말했다. 심 대표는 “당시 나는 상업영화가 무엇인지, 어떻게 관객들을 끌어들여 이윤을 추구할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했다면, 이 감독은 영화의 사회적 역할과 가치를 생각하고 있었다”며 “궁극적으로는 영화에 대한 꿈과, 나와 다른 세계에 대한 선망이 삶의 동반자이자 영화적 동지로서 여기까지 오게 했다”고 말했다. 결혼 당시 심 대표는 첫 장편영화를 기획하고 있었고, 이 감독 역시 장산곶매에 적을 두고 새 작품을 준비 중이었다. 이 감독은 “이럴 바에야 우리 같이 하자”고 의기투합, 명필름이 만들어졌다.
“사회적 관심도 별로 없었고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과 내성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으며, 궁극의 오락적 가치를 지니는 상업적인 매체로서의 영화를 고민하던” 심 대표와 “외향적이며 조직을 이끄는 리더십이 있고 인간과 역사, 사회적 소통의 매체로서 영화를 꿈꾸던” 이 감독의 결합은 명필름의 색깔을 만들어냈다.
▶아름다운 도전은 계속된다
‘마당을 나온 암탉’의 홍보문구 중 하나는 “한국영화의 아름다운 도전”이다. 그 카피는 곧 명필름의 존재증명이나 다름없다. 명필름 16년사와 30편의 필모그래피가 그렇다. ‘접속’은 한국영화도 이렇게 세련되고 고급스러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고, ‘공동경비구역JSA’는 우리 사회의 레드 콤플렉스를 뛰어넘으며 당시만 해도 실패한 신인감독이나 다름없던 박찬욱을 한국영화의 가장 재능 있는 감독으로 세상에 드러냈다. 돌이켜보면 신인감독 김지운의 잔혹 코미디 ‘조용한 가족’이나 낙오자들을 주인공으로 한 ‘와이키키 브라더스’, 가족이라는 이름 속의 엇갈린 욕망과 모순을 그려낸 임상수 감독의 ‘바람난 가족’ 등 어느 한편도 유행이나 흥행공식에 안일하게 기댄 작품이 없었고 ‘모험’이 아닌 영화가 없었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은 영화계의 마이너리티인 여성 감독이 여성 제작자와 함께 여성의 이야기를, 그것도 한국영화의 비인기 소재인 스포츠로 담아낸 작품이다. 명필름은 한국영화에서 ‘잘 만든다’는 평가의 기준을 높였고, 소재와 장르, 스타일, 주제의식의 외연을 확장했다.
어려운 시절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합병으로 덩치를 키웠던 MK픽처스 시기는 정신적, 육체적으로 가장 힘든 때였다. 제작에서 투자, 배급, 극장사업까지 진출했고 1년에 2편 정도 되던 라인업은 4편까지 늘었다. 3명으로 시작해 8~9명 정도였던 직원은 45명까지 불었다. 하지만 대규모 영화사들의 틈바구니에서 결국 MK픽처스는 버텨내지 못하고 3년 만에 깃발을 내렸다.
“안정된 자본을 확보하고 투자와 배급 시장에서도 영향력을 키워보자 했던 시도였어요. 하지만 1년에 한두 편 수제품처럼 영화를 만들던 역량에 비해 커진 규모를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서버가 다운되듯 제 능력에 대한 한계를 체감했죠.”
덩치를 키웠다고 해도 기존 대기업 계열의 영화사와는 자본과 규모, 인력에서 경쟁이 되지 않은 것도 실패 원인이다. “제작에는 유능했지만 산업으로는 미숙했던 탓”도 있었다. 그러나 심 대표는 실패보다는 미완의 도전이었다고 평가했다. 앞으로도 기회가 된다면 투자, 배급으로 사업영역을 확장할 의지는 충분하다.
“명필름은 한국영화계에서 모범을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마당을 나온 암탉’은 국내 애니메이션 시장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젊은 제작사들과 경쟁하기보다는 경험이 적은 그들이 시도하기 어려운 과감하고 모험적인 도전을 하고 모범적인 성공사례를 남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영화를 뺀 심 대표의 삶은 어떨까. 의외의 답이다.
“죽을 때까지 영화일을 하고 싶진 않아요. 그렇게 하지도 못하겠고요. 판단력이나 창의력은 나이가 들수록 나빠지지 않지만 기억력이나 체력은 떨어집니다. 영화라는 것이 성숙한 사람의 머리에서 나와야 하는 어른의 매체지만 한편으로는 젊고 역동적인 미디어이기도 하지요. 제가 과연 칠십, 팔십까지 잘 만들 수 있을까 자신 없어요. 대신 영화일을 그만두면 환경이나 노인, 아동 문제에 관여하고 싶습니다.”
인터뷰=김형곤 문화부장/kimhg@heraldcorp.comㆍ이형석 기자/suk@heraldcorp.com
사진=박현구ㆍ박해묵 기자/phko@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