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지 동네빵집, 선술집은 물론 세탁소도 외국어 간판에 SINCE∼다. 개점과 폐점도 OPEN, CLOSED라고 써붙인다. 고작 이 정도로 서푼어치 배운 티를 내려는 것은 아닐 테고, 영업에도 그다지 도움이 될 것 같지가 않다. 유치한 짓이다.
외국인 관광객 1000만명 시대라고 하지만 동네 빵집에 외국인이 1년에 몇 명이나 오는가. 설사 왔다고 하더라도 어리둥절해할 게 틀림없다. 기껏 돈 들여서 한국 관광 왔더니 뉴욕이나 파리 흉내내기에 안달인 한국의 도시를 마주한다면 적잖이 실망을 하고 돌아갈 공산이 크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야말로 가장 세계적이다’라는 명제는 이런 점에서 공리(公理)에 가깝다. 그렇기 때문에 한옥은 더욱더 보존돼야 하고, 새로운 한옥 건축도 더 늘어나야 한다. 국적 불명의 4차원 디자인이 건축예술에선 높은 평가를 받을지는 모르겠으나 한국 냄새가 물씬 나는 건물은 분명히 가치가 높다. 서울이나 부산 같은 대도시에서 흔적기관처럼 남은 극소수의 문화유산을 제외하면 한국적인 전통을 찾아보기는 어려운 게 현실이다.
다만 말글과 식문화, 민족적 특성에서 한국이라는 정체성이 드러날 뿐이다. 그런데 이런 말글마저도 알파벳과 영어의 극심한 도전을 받아 무너지고 있다. 아니, 차라리 스스로 훼손시킨다고 해야 할 것이다.
달포 전 중국 연길과 용정, 훈춘 등을 다녀왔다. 중국어를 배우기 시작한 입장에서 ‘지린’ ‘옌지’ ‘헤이룽장’ ‘투먼’ 등의 중국어 발음을 흉내내면서 궁금한 것들을 물어봤다. 중국어가 유창한 조선족 안내원은 한심한 듯 쳐다봤다. 그리고 답변은 ‘길림’ ‘연길’ ‘흑룡강’ ‘도문’ 등 한국식 한자발음으로 또박또박 되받았다. 중국 국가주석도 후진타오가 아닌 ‘호금도’, 원자바오 총리는 ‘온가보’로 불렀다. 부끄러웠다.
한인3세 재중동포로 엄연한 ‘중국인’인 그들은 우리 말글은 물론 의식주에서 전통을 훌륭히 지켜내고 있다. 1952년부터 길림성 일부를 떼내 연변조선족자치주로 인정받았지만 자치주 전체 인구는 한족이 60%를 차지하는 현실에서 이같이 정체성을 굳게 지켜나가는 데 대해 존경심이 들었다.
연길이나 용정에는 한글과 한자를 병기한 간판 일색이어서 마치 서울의 대림동이나 가리봉동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중국인인 그들은 ‘한글과 우리말은 우리 민족 최대의 자산’이라고 서슴없이 말한다. 우리가 이런 지적자산에 대해 얼마나 무례한지, 얼마나 죄를 짓고 있는지 금방 드러난다. 연길에서 많이 배워야 한다.
서양 것 흉내내기에 바빠 제것 지키기에 얼마나 노력했는지 되물어보자. 남의 것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천박한 사대주의에 빠져 소중한 것을 내팽개치고 있지나 않은지.
한 외국인 유학생이 언론에 말했다. “한국사람들은 외국인보다 자기 것, 자기들의 문화유산을 더 홀대하더라. 서양 것, 서양풍이면 무조건 높게 쳐주는 사대주의에 골수 자체가 빠져 있더라”고. 며칠 뒤면 창제 565주년이 되는 한글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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