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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전의 히트작‘난타’프로듀서, 15년간 30여편 순수창작극 제작, 1년에 400억 버는 문화CEO… 그러나 송승환은 여전히‘차돌이’다
영국 세인트마틴 극장에 가 본 적 있나요. 

그 곳에선 아가사 크리스티의‘쥐덫’이 57년째 타이틀로 걸려 있지요.

난타가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나 죽고 난 뒤에도 계속되는 작품이 되길 말이죠….

어쩌면 중동의 건설 사업가가 됐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허나 제가 있을 곳은 역시 무대였지요.

올 가을엔 예능프로에도 섭니다. 젊음의 행진 때처럼…

다시 국민MC 될 수 있을까요.





너무 알려져서, 더 물을 것이 있을까 싶었다. 1975년 ‘차돌이’로 아역 배우로 데뷔, 80년대 ‘젊음의 행진’ 진행으로 최고 대우를 받던 ‘국민MC’, 그리고 PMC프로덕션 대표로 ‘난타’를 성공시킨 다양한 성공기의 주인공. 얼마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직을 제의받을 정도로 공연계에서 두뇌와 감성을 겸비했다는 평가를 받는 몇 안 되는 인물이다.

송승환(54) 대표는 청바지에 줄무늬 셔츠, 흰색 운동화 차림으로 나타났다. 옷차림에 대해 “나이 먹어서 모양낼 일 없고, 편한 게 제일 좋다”며 웃었다. 그는 업계에서도 알려진 워커홀릭이다. 잠시도 빈틈없이 스케줄을 짠다. 주말에 주로 어디를 들르냐고 했더니 “난타 공연장”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1년 365일 공연이 올라가는 전용관을 찾는 것이 그의 낙이다.

그가 발로 뛰며 탄생시킨 대표 상품은 ‘난타’, 그의 이름보다 유명하다. 지금까지 41개국, 272개 도시에서 상연된 ‘난타’는 그의 얼굴이자 국가브랜드를 드높이는 매개체다. 송 대표는 “때밀이 관광이 필수코스로 꼽히던 한국 관광에, 난타로 공연 여행상품이 생겼다”며 뿌듯해했다. 매해 120만명의 외국인이 한국에 와서 공연을 보고, 그 중 70만명이 난타를 관람한다. 넌버벌 퍼포먼스로 소위 대박 신화를 썼지만, 이에 안주하지 않고 창작 뮤지컬과 어린이극을 꾸준히 개발 중인 송 대표를 지난달 29일 서울 삼성동 PMC프로덕션 사무실에서 만났다.


▶영원한 차돌이 송승환 “배우는 내 천직”=‘송승환’하면, 윗세대 사이에선 아역배우로 통한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라디오 프로그램 ‘은방울과 차돌이’의 차돌이 역할로 데뷔했다. “연기하는 게 재미있었습니다. 남들은 학교만 다니는데 나는 방송국 가고 영화 촬영도 하고, 공연도 보고, 얼마나 재미있었겠어요.” 어려서부터 말재주가 좋았다. 아역 데뷔하게 된 계기도 말재주 덕이었다. 우연한 기회에 참가한 어린이 동화구연대회에서 1등 했고, KBS 어린이 프로그램에 수상자 자격으로 출연했다. 그러다 방송국 프로듀서의 눈에 들어, 차돌이 역에 전격 발탁됐다.

그때 첫 발을 디딘 뒤 지금까지 방송국을 찾고 있다. 공연 제작자의 길을 걸으면서도 ‘배우’임을 잊지 않는다. 그의 연기관은 무슨 일이 있어도 1년에 한 작품씩, 드라마든 연극이든 한 편씩 출연하는 것이다. 2010년 연극 ‘에쿠우스’로 무대에 올랐고, 올해 초 연극 ‘갈매기’에 이어, 얼마 전에는 드라마 ‘내 마음이 들리니’에 감초 역으로 출연했다.

특히 KBS의 가을 개편 때 정규 편성 예정인 예능프로그램 ‘빅 브라더스’에서 황석영, 조영남, 김용만과 함께 그룹 MC로 컴백할 예정이다. “벌써부터 흥분된다”고 했다.

그는 “배우를 천직이라 생각한다”면서도 “내가 뭘 알아서 배우를 했겠느냐. 재능을 주셔서 한 거다”며 겸손해했다. 그 재능은 송 대표의 여동생 승은 씨에게도 이어져 이벤트 연출계에서 명성을 날리고 있다.

제작자 겸 배우인 그는 “사실 배우가 더 편하다”고 했다. “제작자는 할일이 너무 많아요. 수익 내야죠,마케팅도 해야 하고, 갈등도 조정해야 합니다. 연기는 밤샘 촬영에 힘들지만 내 것 하나만 잘하면 되니까 정신적으로는 편합니다.” 그의 근본은 연기자임을 알 수 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아야 한다”=송 대표의 인생사가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고등학교 때만 해도 연기는 취미생활로 끝내고, 대학가서 새로운 일을 할 작정이었다. 재수 끝에 외대 아랍어과에 입학했다. 중동 건설 바람이 불던 시기였다. 어쩌면 중동 사막을 주름잡는 사업가가 됐을지도 모를 일. 하지만 2학년이 돼서 돌연 자퇴를 결심하고 대학을 뛰쳐나왔다.

왜 굳이 자퇴까지 했을까. 그는 명확한 동기가 있다면, 결단을 두려워하지 않는 성격이다. 물론 부모님은 결사반대했다. “대학 그만둔다는데 ‘그래라’ 할 부모 없잖아요. 설득이 힘들었지만 ‘내가 하고 싶은 걸 열심히 해보고 싶다’고 했죠. 결국 극단에 들어가서 연기를 다시 시작했어요.”

철부지처럼 막연하게 부푼 마음이 결단의 원동력은 아니었다. 꼼꼼하게, 구체적인 내용을 예상해가며, 자신만의 청사진을 만들었다. 그는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을 하고 살아야 한다’는 소신이 강했다.

물론 고민도 컸다. “그때 노트에다 막 썼던 것 같아요. ‘내가 배우로 인생을 산다면 어떻게 살까’, 반대로 ‘공부한다면 어떻게 될까’ 노트에 구체적으로 써내려 가면서 고민했어요.”

당시 생각에 대학교 2학년, 20살이 어린 나이가 아니었다. “8살 때부터 연기 생활을 했으니,남들 기준에서 스무 살은 어린 나이지만 12년 경력을 감안하면 어린 것도 아니었죠.(웃음)”

그래서인지 공연계 사람을 빼면 배우 강남길, 임예진, 강석우, 가수 김수철, CF 감독 김정훈 등 같은 아역 배우출신들과 친하다.


▶약혼, 유학,여행…송승환의 사랑방정식=그러다 한 여인을 만났다. 평생의 동반자로 지금도 젊은 연인처럼 한 달이고 여행을 함께 떠나는 부인 박찬실 씨. 송 대표가 ‘젊음의 행진’ MC 시절 자주 가던 카페의 단골손님끼리 조우였다. 동갑내기였던 그녀와 자연스레 합석하면서 친해졌다. 사랑에 빠진 뒤, 선택도 여느 젊은이들과 달랐다. 1985년 약혼식을 하고,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당시 스포츠 신문 1면에 크게 다뤄질 정도로 대형뉴스였다. 그렇게 3년간 미국 유학생활을 같이 한 뒤, 돌아와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보다 동거를 먼저 시작한, 당시로선 파격적인 행동이었다.

송 대표는 지금도 아내와 모든 일을 함께하는 잉꼬부부로 유명하다. 스스로도 ‘애처가’라 했다. 그는 “얼마 전에는 한 달간 미국, 영국, 그리스 등을 여행했다. 24시간 한 달간 와이프랑 즐겁게 여행할 정도면 애처가라고 하더라”며 웃었다. 주변에서는 ‘결혼 20년도 넘은 부부가 함께 여행하다니 고행 수준이었을 것’이라며 웃거나 말거나 아랑곳없이 부부는 즐거웠다고 했다. 부인에 대해선 “인테리어나 의상 디자인 쪽을 공부했으면 잘 했을 테지만, 교회 일 열심히하고 주말엔 여러 봉사활동을 다니는 평범한 여자로 살고 있다”고 했다.

송 대표는 두 집 살림 중이다. 자택은 경기도 파주 타운하우스에 있지만 주중에는 여의도 오피스텔에서 지낸다. PMC프로덕션이 광화문에서 강남으로 옮긴 뒤에는 출퇴근 동선이 너무 길어진 탓이다. 항상 부인과 함께, 파주와 여의도를 왔다갔다 한다. 슬하에 자녀가 없는 송 대표는 적적하지 않냐는 물음에 “적적하다는 건, 뭐가 있다가 없을 때 느낌인데, 애초에 아이가 없으니, 허전한지 잘 모르겠다”며 웃었다.

▶‘난타’ …“나 죽고 나서도 쭉…”=1996년 송 대표와 고교동창인 이광호 씨와 공동 설립한 PMC프로덕션은 현재 직원 120여명이 일한다. 계약직 배우와 스태프를 합하면 200명이 넘는 공연계의 대기업이다. 설립 시 5명으로 시작했으니, 직원 규모만 40배 넘게 커졌다. 송 대표는 “디즈니처럼 대형 회사를 만들겠다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좋은 작품을 열심히 만드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

97년 첫선을 보인 ‘난타’는 올해 14년 된 장수 공연이다. ‘송승환’하면 ‘난타’. ‘난타’하면 ‘송승환’이 연상될 정도로, 떼려야 뗄 수 없는 조합이다. 송 대표는 어딜 가든 “난타를 14년이나 계속하느냐는 질문에, 아직 14년밖에 안 됐다고 말한다”고 했다. 그에게 ‘난타’는 그가 이 세상을 떠나고도 존재할 ‘불멸의 공연’이었으면 싶다.

송 대표는 영국 런던에 가면 꼭 들르는 세인트 마틴극장을 예로 들며 “아가사 크리스티의 ‘쥐덫’은 57년째라는 타이틀을 앞에 내건다. 난타도 그렇게 되길 바란다. 내가 죽고 난 뒤에도 계속되는 작품이었으면 한다. (쥐덫의) 기록을 깨려면 앞으로 40년을 더 해야 한다”고 싱긋 웃으며 말했다.

‘난타’뿐만 아니라, 매해 다양한 창작 뮤지컬을 내놓는 PMC는 다작(多作)으로 유명하다. 모든 작품이 난타처럼 수익을 거두는 것은 아니다. 주로 난타가 벌어들이는 수익으로, 새로운 콘텐츠 개발에 투자하는 셈이다.

예컨대 지난해 매출 400억원 중 절반을 난타에서 벌었으니, 효자도 이런 효자가 없다. 다른 제작사에서 엄두도 못낼 창작 뮤지컬에 PMC가 유독 집중하는 것도 난타 덕이다. 그는 “난타로 번 돈으로,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다. 다양한 작품을 올릴 수 있는 것도 난타 덕이다”고 했다.

원래 PMC프로덕션은 P(Performanceㆍ퍼포먼스), M(Musicalㆍ뮤지컬), C(Cinemaㆍ영화)를 앞세운 회사였다. 하지만, 퍼포먼스(난타)와 뮤지컬 외에 영화로 성공을 거둔 것은 없다. 송 대표는 “초창기 외화 수입도 했고, 영화 ‘굳세어라 금순아’도 제작했지만, 이상하게 C(시네마)로는 재미를 못봤다”면서도 “C를 다른 단어로 교체할 생각은 없다”고 했다. 그는 “언젠가 내가 떠나고 이 회사에 새로운 대표가 와서 영화 제작할 날이 올 수도 있지 않겠느냐”며 회사의 미래를 멀리 내다봤다.

▶“국산 창작 뮤지컬로 브로드웨이 입성이 꿈”=“초등학교 때 10번 이상 읽은 책이 있어요. 부모님이 2학년 때 사다주신 세계어린이명작전집 열 권이에요. 초등학교 졸업까지 보고 또 보고, 달달 외울 정도로 읽었어요. 그때 제가 배우를 할 수 있는 잠재적인 능력, 창의성이나 상상력이 다 만들어진 것 같아요.”

PMC는 ‘가루야가루야’, ‘어린이 난타’ 등 유독 어린이극 제작에 힘을 쏟아왔다. 송 대표 스스로 어린 시절 문화적 자극의 수혜자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는 “공연 관람도 일종의 습관이다. 어릴 때 공연을 보면서 재미있고 도움이 되며 깨달음이 있어야 커서도 공연을 볼 것”이라며 “감수성이 예민한 어린 시절에 보는 공연이 인생관에 큰 영향을 준다고 생각한다. 또 미래 관객을 개발한다는 의미도 있다”고 했다.

송 대표의 사무실 문에는 ‘브로드웨이(broadway)’라는 문구가 붙어있다. 2003년 난타를 들고, 브로드웨이 진출에 성공한 선구적인 인물. 그의 도전은 끝이 없다. “영국과 미국을 제외하고 1년에 100편 이상 뮤지컬을 만드는 나라는 대한민국이 유일해요. 언젠가 우리 뮤지컬을 브로드웨이에 가져가서 공연하는 게 꿈입니다. 브로드웨이 웨스트엔드의 캣츠 레미제라블 팬텀처럼 세계적인 작품과 어깨를 겨룰 수 있는 그런 뮤지컬을 만드는 거죠.”

송 대표는 특히 창작 뮤지컬, 그 중에서도 주크박스 뮤지컬에 관심이 많다. 70ㆍ80년대 음악을 기반으로 만든 ‘달고나’, 80ㆍ90년대 ‘젊음의 행진’, 2000년대 ‘늑대의 유혹’까지. 시대별 주크박스 뮤지컬 시리즈를 완성했다.

그는 알려진 음악을 배경으로 한 주크박스 뮤지컬이 훨씬 성공률이 높다고 믿는다. “뮤지컬은 상업적인 장르인데, 아직 한국은 뮤지컬 제작 인프라가 약해요. 작가, 연출, 전문작곡가 등이 많지 않거든요. 대중들이 생전 처음 듣는 노래로, 극장에서 감동을 느끼긴 쉽지 않아요. 알려진 노래를 배경으로 한 주크박스 뮤지컬이 훨씬 유리한 이유입니다”

▶문화부 장관? “제가 갈 자리가 아니죠”…“이젠 성공이 아닌 행복입니다”=“하하. 고민 안 했어요. 전혀 생각도 안 했으니까요. (장관직은) 제가 갈 자리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고사한 거죠. 저 같은 문화기획자가 아닌 문화행정가가 가야 할 자리에요. 장관하면 양복 입고 넥타이 매고 다녀야 하는데, 갑갑해요. 이렇게 청바지에 운동화 신고 다녀야 일도 잘하거든요.”

지금 당장은 아니어도, 앞으로 생각이 있냐고 묻자 “공직에는 전혀 관심없다. 자유롭게 살며, 공연 일만 하고 싶다”고 못박았다. 그는 “공직은 굉장한 책임감을 가져야 하는 자리인데, 감당할 능력이 없다. 공직에 있어야만 국가에 기여하는 건 아니니까, 제가 ‘난타’ 이후에 또 작품을 만들어서, 한국문화를 세계에 알릴 수 있다면, 그게 국가를 위한 것일 수도 있다. 어울리지 않는 옷을 억지로 입고 잘할 자신이 없다”고 했다.

아역배우부터 난타 신화까지. 뭐든 착착 실행에 옮기고 성공을 이뤄온 그의 좌우명은 뭘까.

“어렸을 때부터 일을 많이 했어요. 학교에서는 조퇴하고 촬영해야 하니까, 대본 외우느라 바빴고, 방송국 분장실에서는 책 펴놓고 시험공부하느라 늘 바빴죠. 머릿속에 생각이 많다 보니, 어려서는 좌우명이 ‘순간순간 충실하자’였어요. 요즘엔 국가나 기업, 개인이 ‘성공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살지 않았나는 생각이 듭니다.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가 됐고, 이제 우리 가치관이 어떻게 하면 성공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까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봐요. 저 역시 ‘어떻게 하면 우리 회사를 키울까’보다는 ‘저나 우리 직원들이 행복해질 수 있나’를 먼저 생각합니다.(웃음)”



인터뷰=김형곤 문화부장/kimhg@heraldcorp.com
정리=조민선 기자/bonjod@heraldcorp.com
사진=이상섭 기자/babtong@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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