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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만주 대평원을 바라보며
지난달 중국 지린(吉林)성 성도인 창춘(長春)을 다녀왔다. 중국 공산당 기관지인 인민일보사와 지린성 정부가 공동 주최한 제1회 한ㆍ중ㆍ일 언론 포럼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신문ㆍ방송ㆍ통신 등 3국의 주요 매체 종사자 100여명이 머리를 맞대고 ‘동북아 경제협력의 원동력’ ‘두만강 유역 개발과 지역협력’ ‘한ㆍ중ㆍ일 협력에서 매체 추진력’ ‘재해 방지와 매체의 사회적 책임’ 등을 논의했다.
중국은 언론 포럼에 쑨정차이(孫政才) 지린성 당서기, 장옌눙(張硏農) 인민일보 사장 등이 직접 참석, 깊은 관심을 보이면서도 이를 지린성 투자유치로 연계하려는 흔적이 역력했다. 포럼 직후 창춘 국제회의전시센터에서 제7회 동북아투자무역박람회를 성대하게 연 것이다. 비슷한 시기의 제7차 한ㆍ중 재계회의, 동북아 지방정부 지사ㆍ성장 회의도 같은 맥락이다.
중국은 일련의 행사에서 창춘-지린-투먼장(圖們江)을 연결하는 ‘창지투’ 개발계획 홍보에 열을 올렸다. 북한 나진-선봉 경제특구 및 러시아 극동지역과 연계한 3국 간 경제특구 건설을 목표로 석유화학, 자동차부품, 농산품 가공, 바이오 의약 부문 등에 한ㆍ일 기업의 투자를 기대했다. 옌볜(延邊)조선족자치주 훈춘(琿春)의 자유무역종합지대 개발과 나진항을 통한 동해 진출 구상도 공식화했다.
사실 지린성의 투자 여건은 중국 내에서 괜찮은 편에 속한다. 중국 전체 평균을 뛰어넘는 고성장 지역으로 남한 국토 2배 면적의 2700만 인구는 상대적으로 양질의 노동력을 공급하면서 구매력도 높다. 시진핑(習近平) 이후 6세대 지도자로 부상한 40대 쑨정차이 서기의 열정적인 개발의지는 지린성의 강점이랄 수 있다.
투자박람회 개막식 열기를 뒤로하고 시내에서 룽자(龍嘉)공항으로 향하는 고속도로 주변엔 어김없이 무한한 옥수수 밭이 펼쳐졌다. 이는 전날 쑹화강변 지린시를 왕복하며 질리도록 봤던 만주(간도) 대평원의 아련한 기억을 되살렸다. 만주가 언제부터 중국 땅이었던가. 일본과 청나라가 1909년 체결한 간도협약 이후다. 불과 100여년 전이다. 이전엔 고구려, 발해 등 우리 선조들의 터전이었다. 흉노, 부여, 말갈, 거란, 여진, 몽골, 만주족 등이 번갈아 주인 행세를 했을 뿐 17세기 이전만 해도 중국 한족(漢族)은 출입마저 금지됐던 무주(無主) 지역이다. 아직도 우리에겐 200만 조선족이 사는 항일투쟁 성지이기도 하다.
중국은 이른바 동북공정 차원에서 만주 개발에 나설지 모르나 이곳은 본디 우리 땅이란 사실(史實)이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실제로 외교관 출신의 강효백 경희대 교수는 청나라와 우호관계를 유지했던 조선 후기 정약용의 ‘아방강역고’와 국가공인지도인 ‘동국대지도’에서 요하 동쪽(만주)을 조선 영토로 적시하고 있고, 1932년 일본이 괴뢰 만주국을 세울 때 중국은 마치 일본과 밀약을 맺은 것처럼 이를 못 본 체했으며, 반대로 대한민국임시정부 헌법은 만주와 북방 영토를 ‘대한의 고유한 판도’라고 분명히 못박고 있다는 점을 들어 ‘만주 영토설’을 제기한다. 한족(漢族)에게 만주는 없었다는 강 교수 주장은 일리가 있다.
때문에 국내 기업의 지린성 무역 및 직접투자는 적극 추진할 필요가 있다. 수익증대 및 보이지 않는 ‘영토확장’ 말고도 북한에 자유시장경제 전파 효과까지 기대하는 것이다. 중국의 동북공정을 무력화하기 위해서라도 더욱 그렇다. 100년 후 역사는 어떻게 변할지 아무도 모른다. 사족을 붙이자면 2005년 당시 정동영 통일부 장관은 대한민국 영토를 지금의 휴전선 이남으로 한정하자는 개헌 필요성을 제기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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