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는 우리나라 역사상 회화가 가장 발달한 시대였다. 일단 수적으로 많은 작품이 남아있을 뿐 아니라, 그 수준도 뛰어났다. 장르 또한 다양했다. 찬란하면서도 운치 넘치는 조선 회화의 정수를 만날 수 있는 전시가 서울 두곳에서 동시에 열린다. 한국을 대표하는 두 사립미술관인 한남동의 리움(Leeum)과 성북동의 간송(澗松)미술관에서 열리는 ‘조선화원대전’과 ‘풍속인물화대전’이 그것. 여간해선 접하기 힘든 국보, 보물급 회화는 물론이고, 국내외 주요 박물관에서 어렵사리 대여해온 작품이 한데 모인만큼 놓쳐선 안될 전시다.
▶세상을 바꾼 화원의 붓, 조선화원대전= 삼성미술관 Leeum은 개관 7주년 기념으로 조선시대 화원(畵員)들의 작품을 한데 모은 ‘조선화원대전’을 오는 13일개막한다. 이번 전시는 리움이 오랫만에 야심적으로 펼치는 고미술전시로, 조선시대 회화사에서 문인화와 함께 양대산맥을 이뤘던 화원들의 그림을 입체적으로 조명한 자리다.
화사(畵師), 화사(畵士), 화공(畵工)으로도 불렸던 화원은 엄정한 실력테스트를 거쳐 도화서에 소속돼 국가의 다양한 그림프로젝트(?)를 수행한 프로화가다. 임금의 행차도라든가 어진, 국가행사와 임금의 어진과 공신의 초상을 그리는 존귀한 작업에서부터 궁중장식용 ‘일월오악도’ ‘십장생도’, 지도, 불화, 심지어 궁중책자에 삽화를 그려넣는 일러스트레이터까지 화원들은 다방면에 걸쳐 활약했다. 용이며 모란이 그려진 명품 청화백자 속 그림 또한 화원들의 솜씨다. 게다가 실력이 출중한 화원은 사가(私家)의 주문을 받아 산수나 초상화도 많이 그렸다. 그만큼 당대를 풍미했다는 얘기다.
그러나 화원들의 그림은 그동안 문인화에 비해 격이 현저히 낮은 것으로 평가돼왔다. 하지만 화원이 없었다면 조선시대 그 찬란했던 회화의 전성기도 없었을 것이라고 학자들은 입을 모은다. 그들이 붓으로 조정의 행사와 임금, 공신들의 초상, 선비와 민중의 풍류와 삶을 성실히 그렸기에 오늘 우리는 그 생생한 역사 속으로 걸어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또 아름답고 기품있는 궁중장식화를 비롯해 서정적인 산수화와 해학 넘치는 풍속화 등을 통해 화원들의 작업이 얼마나 폭이 넓고, 역량이 탁월했는지 확인할 수 있다. 선비화가들은 화원들의 이같은 그림솜씨에 탄복한 나머지 이를 애호한 예가 적지않다. 이를 전하는 문서가 여러 건 전해진다.
왕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남송의 유학자 주자(朱子)의 주자학을 통치이념으로 삼았던 정조는 단원 김홍도가 주자의 시(詩)를 6폭 병풍에 멋드러지게 담아 ‘주부자시의도’(1800년 작)란 작품을 바치자, 감격한 나머지 화답하는 시를 내리기도 했다. 화원이 혼신을 다해 그린 이 그림은 조선의 통치이념을 시각화한 대표적인 예로, 예술가의 붓의 보여줄 수 있는 정점의 세계를 우리 앞에 드리운다.
이번 전시에는 김득신 등이 그린 ‘화성능행도’(보물1430호,1795년), 이인문의 ‘강산무진도(18세기후반)’, 김홍도의 ‘군선도’(국보139호,1776년), 작가미상의 ‘동가반차도’(19세기 후반) 등 걸작들이 일제히 내걸렸다. 이들 그림은 엄청난 스케일과 짜임새있는 구도, 완벽한 표현력이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한다. 특히 가로 9.96m의 대작인 ‘동가반차도’는 이번에 일반에 최초로 공개되는 것이어서 관심을 모은다. 또 장승업의 ‘영모도 대련’과 일본 동경국립박물관에서 대여해온 ‘유모도’, 변상벽의 ‘묘작도’(고양이 그림) 또한 그 뛰어난 묘사력이 가히 압권이다.
전시는 김홍도 김득신 이명기 이인문 장승업 등의 국보및 보물급 회화를 포함해 110점이 출품됐다. 가장 속된 그림인 ‘춘화’에서부터 문인들의 전유물로만 꼽혔던 ‘관념산수’까지 다방면에 걸쳐 작업한 화원들의 예술세계를 조망하고, 그들의 업적을 재평가하기 위해서다.
전시를 기획한 Leeum의 조지윤 책임연구원은 “학자들간에 ‘조선회화는 (화원이었던) 김홍도가 절반이다’는 평이 나올 정도로 화원들의 활약은 실로 대단했다.‘풍속화’같은 새로운 장르를 창안해 발전시킨 것도 화원들”이라며 “이번 전시로 조선시대 최고의 예술가집단이었던 화원들의 예술혼과 업적을 음미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전시는 화원 화가들의 정체성을 입체적으로 살피기 위해 ▷왕실회화-화원의 붓, 왕실의 권위를 세우다 ▷일반회화-화원의 붓, 조선을 그리다로 나뉘어 짜여졌다.
6년 만에 고미술 기획전을 개최하는 Leeum은 전시연출에 공을 많이 들였다. 현대적인 미디어를 선호하는 관람객들이 전통회화를 보다 실감나고 생생하게 감상할 수 있도록 전시장 도입부에 긴 성곽을 조성했다. 이에따라 왕의 행렬을 따라 성안으로 들어가며 그림을 감상하는 듯한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다. 또 전통한옥이며 정자를 연상케하는 공간도 조성해 찬란한 전통회화의 아름다움과 의미를 음미하게 했다.
특히 첨단 디지털장비를 이용해 화원들의 정교한 필력을 세밀히 감상할 수 있게 한 것이 두드러진다. ‘동가반차도’와 정조의 화성행차를 그린 ‘환어행렬도’의 경우 세부까지 꼼꼼히 살필 수 있도록 갤럭시탭과 DID 고해상도 모니터를 설치했다. 이에따라 관람객들은 손톱 보다 작게 그려진 각 인물들의 표정과 자세가 그토록 다양하고 생생한 것에 놀라게 된다. 임금의 행차임에도 불구하고 딴 곳을 바라보거나 조는 군사들이 있는가 하면, 고종황제의 행차를 기록한 것으로 추정되는 ‘동가반차도’에는 황실의 황금빛 깃발과 함께 이미 태극기가 등장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홍라영 Leeum 총괄부관장은 "지금까지 전통회화 전시는 다소 고루하게 느껴져 젊은 층들은 별반 선호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 전시는 첨단 디지털장비를 통해 관람객이 직접 작품 속의 이미지들을 찾아 확대해보는 등 인터랙티브한 전시로 꾸며 새로운 문화체험을 할 수 있을 것"이라며 "도화서 체험, 청소년 교육프로그램, 기획강좌 등 부대행사도 다채롭게 마련했다"고 밝혔다. 전시는 내년 1월 29일까지. 02)2014-6900
▶민중 곁으로 다가간 조선화가들의 해학과 여유, ‘풍속 인물화대전’=일년 내내 꼭꼭 문을 닫아걸다가 봄,가을 보름씩만 그 골갱이를 선보이는 성북동의 간송미술관이 가을 정기전으로 조선시대 풍속화와 인물화의 변천을 살펴보는 전시를 16~30일 연다. 전시에는 안견(1418-?)에서부터 이당 김은호(1892-1979)에 이르기까지 조선왕조가 배출한 52명의 화가가 그린 인물풍속화 100여점이 나온다.
이번 전시를 통해 중국과는 전혀 다른, 우리 식의 진경산수를 그리는데 앞장 섰던 겸재 정선(1676-1759)이 풍속화에서도 뛰어난 역량을 지녔음을 확인할 수 있다. 겸재에 이르러 비로소 그림 속에 조선식 복식이며 지게 등이 등장했고, 당시 백성의 삶이 그림에 온전히 반영됐다. 이어 관아재 조영석(1686-1761) 등이 겸재의 뒤를 이어 조선 풍속화의 기틀을 다졌다.
이들 사대부 화가에 의해 시작된 조선의 풍속화는 단원 김홍도(1745-1806), 긍재 김득신(1754-1822), 혜원 신윤복(1758-?) 등 화원들에 이르러 그 절정에 이르렀다. 전시에는 단원의 걸작 ‘마상청앵(馬上聽鶯)’ 등 주요 작가의 대표작이 다수 포함됐다.
또 인물풍속화에 남다른 기량을 보였던 혜원 신윤복의 은근한 춘의화 ‘춘색만원’ ‘소년전홍’ ‘연소답청’ 등도 나온다. 당시 양반 자제들과 사대부 집안의 내밀한 풍속을 담은 혜원의 그림은 그 절묘한 표현력과 해학이 언제 봐도 감탄스럽다. 혜원의 저 유명한 그림 ’미인도’도 다시 공개될 예정이어서 성북동 일대에 또다시 긴 줄이 들어설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무료관람. 02-762-0442.
이영란 선임기자/yrlee@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