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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훈, “내 소설에 주인공은 없다”
“정약전은 배교하고 현실의 삶으로 돌아온 사람입니다. 죽을 때까지 섬에서 물고기를 들여다보다 죽었습니다. 한 권의 책도 없고 어떤 문자도, 언어를 교환할 사람도 없는 곳에서의 답답함과 기막힌 슬픔을 그렸습니다.”

한 자 한 자, 그 말이 있어야 할 자리에 꽂고야 마는 치열하고 정확한 글쓰기의 작가 김훈(63ㆍ사진)이 역사소설 ‘흑산’(학고재)을 펴내며 20일 기자간담회를 가졌다. 새 역사소설은 ‘남한산성’을 펴낸 지 4년 만이다.

소설은 18세기 말과 19세기 초 서양문물과 함께 유입된 천주학이 조선사회의 전통과 충돌하며 빚어낸 역사의 큰 격절의 시기, 정약전ㆍ황사영 등 천주학 지식인의 내면풍경, 학정과 성리학적 신분질서의 부당함에 눈떠가는 백성의 움직임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방 앞까지 차 들어온 큰 물속에서 이들이 어떤 포즈를 보여주느냐가 김훈이 들여다보려는 지점이다.



“소설에는 많은 순교자가 나오고 배교자가 나옵니다. 정약용은 적극적ㆍ능동적으로 배교했죠. 배교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천주교 신자를 밀고했고, 그 대가로 목숨을 부지해 많은 학문적 업적을 남겨 후세에 추앙받는 인물이 된거죠. 배교해서 살아남은 이도 있고, 배교했지만 먼저 맞은 매 때문에 살아남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소설은 정약전이 흑산도로 유배를 떠나는 뱃길에서 시작한다. 약전은 막막한 흑산 바다 앞에서 “여기서 살자, 고등어와 더불어…섬에서 살자”한다. 함께 천주교리를 공부하며 세상 너머를 엿보았지만 끝내 제 길을 간 약종, 돌아서 다시 세상 속으로 간 약용과도 다르다.

그런가 하면 조카사위인 황사영은 새 세상의 소식을 전하는 투사로서의 삶을 산다. 사학의 거흉으로 지목된 후 체포망이 좁혀오자 제천 배론 마을의 토굴로 피신하지만 북경교회에 전할 편지가 발각되면서 능지처참을 당한다. 황사영은 16세에 장원급제해 정조가 친히 등용을 약조할 만큼 앞길이 창창했던 인물이다. 



소설은 주인공이라 불릴 만한 인물을 꼭 집어낼 수 없다.

중인, 하급 관원, 마부, 어부 노비 등 각계각층의 인물은 제 목소리를 내며 저마다의 상황을 증언한다. 거기에 판단은 없다.

김훈은 “수많은 죽음이 다 대등하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작가는 소설을 다 쓰고 나니 하나의 이미지가 떠올랐다고 한다.

다윈의 새와 정약전의 물고기가 겹쳐졌다.

생명은 자신을 변화시키지 않고선 생명을 보존할 수 없다는 자연의 거대하고 장엄한 흐름을 잡아낸 다윈과 흑산도 물고기의 비늘을 세며 조용한 관찰자로 남은 약전의 차이와 그 너머다.

김훈은 “수억만년의 시공을 건너온 자연의 거대하고 장엄한 생명현상 끝에서 자유와 사랑, 이상, 목표가 만나는 걸 그려보고 싶었는데 조금밖에는 그려내지 못한 것 같다”고 말했다.

이미지는 김훈의 그림으로 탄생했다. 그가 만들어낸 하늘을 나는 괴수의 이름은 ‘가고가리’. 대해를 건너가는 새, 배, 물고기 그리고 대륙을 오가는 말을 한 마리의 생명체로 형상화한 것이다. 그는 다윈의 시조새 화석사진을 보면서 10분 만에 그렸다고 했다. “진화의 수억만년 시공을 건너서 또 가고 가는 모습이죠.”

이 그림은 책 표지로 쓰였다.


이윤미 기자/mee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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