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은 시로 자신을 어떻게 그려낼까. 33년간 이어져온 문학과지성 시인선 400호 ‘내 생의 중력’은 83명의 시인이 각자 스스로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엮었다. 말하자면 ‘시인의 초상’이다. 매 백번째 시집을 그 이전 1~99번까지의 시집에서 각 한 편씩을 뽑아 ‘시선집’으로 엮어온 전통에 따라 이번 시집도 300번대를 장식한 시인들이 자신의 초상을 하나씩 골라 한데 모았다.
시인 황동규는 불의 형상으로 살고 있는 향나무의 모습을 그려내며, ‘이 살아 불타는 향로 앞에서/이 세상에 태울 향 아닌 게 무엇이 있나?’(‘향(香)’)고 자문한다.
마 종기는 북해의 외딴 억새와 순천의 화사한 억새의 자유로운 길떠남을 통해 ‘내가 찾던 평생의 길고 수척한 행복을 우연히/넓게 퍼진 수억의 낙화 속에서’ 발견한다.(‘북해의 억새’)
오규원은 ‘둑과 나’에서 바닥에서 몸을 세워 위험하고 비틀거리며 걷고 기고 나비가 돼 허덕허덕 허공을 퍼덕이기도 하며 나아가다 끝내 미루나무의 그늘이 된 나를 그려낸다.
황인숙은 ‘거미줄처럼 얽힌 복도를 헤매다 보니/바다//바닷가를 헤매다 보니/내 좁은 방//’(‘알 수 없어요’)으로 돌아오고, 장석남은 연못가에 ‘바람에 씻은 불처럼’ 앉아 있다.(‘연못’)
김혜순은 ‘전 세계의 쓰레기여 단결하라’에서 사람들의 욕망에 봉사하고 버려진 것을 하나하나 호명하며 제 생명을 다시 불어넣어준다.
이원의 ‘영웅’은 구질구질한 일상을 뛰어넘는 경쾌함으로 날아오른다. ‘오늘도 나는 낡은 오토바이에 철가방을 싣고/무서운 속도로 짜장면을 배달하지//(...)오토바이가 기울어도 짜장면이 한쪽으로/쏠리지 않는 것/그것이 내 생의 중력이야(....)길이 사라진 곳에서 나는/파도를 타고 삐딱한 내 생을 관통하지’
평론가 강계숙은 이번 시집의 해설 ‘간절하지, 돌고래처럼’에서 “시인의 얼굴을 보는 일은 시의 몸을 더듬는 길이며, 시에 이르는 첩경은 시인의 내면을 가늠하는 데서 출발한다”며 마침내 독자는 “시인이 곧 시고, 시가 곧 시인인 불가능한 사건의 도래, 그 고통스런 꿈의 실현을 이번 시집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윤미 기자/meelee@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