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태 대법원장이 고질적 ‘기수(期數) 문화’ 타파를 시도하고 있다. 일선 법원장 등 고위 법관들이 정년 때까지 법원에 남아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법연수원 후배가 고법부장, 법원장, 대법관 등에 먼저 승진한다고 선배 기수들이 동반 사퇴하는 잘못된 기수 문화 관행을 바로잡아야 평생법관제도의 진정한 의미를 살릴 수 있다는 얘기다.
현행 사법부 기수 문화는 수십 년간 쌓아온 법조 경험과 지식을 한꺼번에 사장시키는 국가적 낭비다. 차관급인 고법부장 1명을 양성하려면 25년 안팎의 시간과 30억원 정도의 국민 세금이 들어간다. 당장 금년에 2명, 내년에 또 4명의 대법관이 바뀌는데 기존 관행대로 선배 법원장들이 대거 사퇴하면 법원 역량은 그만큼 줄어들 수밖에 없다. 젊은 판사들의 튀는 판결이 더 극성을 부릴지 모른다.
차별적 서열주의 폐해 또한 막대하다. 해병대처럼 엄격한 기율이 필요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낡은 관료주의에 집착, 유전무죄(有錢無罪) 무전유죄(無錢有罪) 온상인 전관예우 풍토로 이어진 것이다. 선배 법관이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면 현직 후배 법관이 사건을 몰아주고 승소 확률도 높여주니 재판의 독립성과 중립성이 훼손되기 일쑤다.
이 때문에 양 대법원장의 시대착오적인 기수 문화 고리 끊기는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 판사들이 정년 때까지 법복을 입고 있다면 손가락질 받는 ‘전관’이 있을 리 없다. 또 젊은 ‘영감님’보다 경륜 있는 재판장은 사법부 신뢰를 높이고 재판 불복률도 떨어뜨릴 것이다. 이에 따른 업무 경감 효과도 기대할 만하다.
법관들도 동기나 후배 밑에서 일할 수 있다는 인식 전환이 시급하다. 대법원장 동기, 대법관 선배기수라고 해서 법원을 떠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상대적으로 위계질서가 강한 경찰, 국가정보원, 국세청에서도 이미 깨진 유습에 사법부가 연연하는 것이 도리어 이상하다. 전관예우에 기대려는 ‘용퇴’야말로 이젠 부끄러운 세상이 됐다는 사실을 명심하기 바란다.
양 대법원장은 순환보직제 등 이를 뒷받침할 제도적 개선에 소홀함이 없어야 할 것이다. 승진하지 못한 선배 법관이 자긍심을 갖고 일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하고, 후배 법관 또한 무언의 사퇴 압력 대신 선배를 존경하는 풍토와 이를 위한 시스템 구축이 시급하다. 지난 8월 한상대 검찰총장 취임 이후 부분 시행한 검찰의 기수 문화 깨기 역시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