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데일리] 여기 시를 사랑하여 시를 쓰고 싶은 여자가 들려주는 시가 있다.보그 코리아 10년차 에디터 김지수의 <시, 나의 가장 가난한 사치>(페이지원. 2011)가 그것이다. 책엔 그가 선택한 50편의 시와 일상이 담겼다. 그러니까 그녀의 일상엔 언제나 시가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시를 앓고 있었다. 지독하게 시를 사랑하고 있었던 거다. 수록된 50편의 시는 다 좋았다. 내가 알고 있는 시인과 시는 많지 않았다. 세상엔 너무도 좋은 시가 많았고, 시인이 많았던 것이다. 다양한 시를 만나서, 잊고 있었던 시를 만나서 좋았다. 어떤 시에선 엄마를 보았고, 어떤 시에선 생을 생각했으며 어떤 시에선 나를 돌아보았다.
신현림의 <침대를 다고 달렸어>를 읽어주며 척추 수술을 받은 아버지와 임신한 자신의 지난 시간을 들려준다. 여전하게 풀어내야 할 삶이라는 숙제를 안고 사는 우리에게 필요한 건 한 줄의 시일지도 모른다.
침대를 타고 달렸어 / 신현림
누구나 꿈속에서 살다 가는 게 아닐까 / 누구나 자기 꿈속에서 앓다 가는 거 / 거미가 거미줄을 치듯 / 누에가 고치를 잣듯 / 포기 못할 꿈으로 아름다움을 얻는 거 // 슬프고, 아프지 않고 / 우리가 어찌 살았다 할 수 있을까 / 우리가 어찌 회오리 같은 인생을 알며 / 어찌 사랑의 비단을 얻고 사라질까 (p. 80)
시가 있어 참 다행이지 않은가. 시인의 일상이 고통 속에 있다 하더라고 우리네 생에 그들이 있다는 건 정말 고마운 일이다. 시는 아무 말 없이 누군가의 슬픔을 받아주고 눈물을 닦아준다. 그래서 시가 좋은 것이다. 시를 이해할 수 없지만 말이다.
이 책은 아주 편안하다. 그건 누구나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일상과 특별히 여자의 감성을 잘 어루만져 주기에 그렇다. 시를 좋아하는 이에겐 시가 있어 좋을 책이고, 저자의 책을 읽은 이라면 더 반가울 것이며, 가을이라는 계절에 잘 어울리는 책이라 좋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시간, 나를 찾는 여행을 떠나는 시간, 커피나 술을 마시다 펼쳐도 좋을 것이다. 지치고 고단하여 기댈 어깨가 필요한 당신에게 나는 이런 시들을 읽어주고 싶다.
속리산에서 / 나희덕
가파른 비탈만이 / 순결한 싸움터라고 여겨 온 나에게 / 속리산은 순하디순한 길을 열어 보였다 / 산다는 일은 / 더 높이 오르는 게 아니라 /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이라는 듯 / 평평한 길은 가도 가도 제자리 같았다 / 아직 높이에 대한 선망을 가진 나에게 / 세속을 벗어나도 / 세속의 습관은 남아 있는 나에게 / 산은 어깨를 낮추며 이렇게 속삭였다 / 산을 오르고 있지만 / 내가 넘는 건 정작 산이 아니라 / 산 속에 갇힌 시간일 거라고, / 오히려 산 아래서 밥을 끓여 먹고 살던 / 그 하루하루가 / 더 가파른 고비였을 거라고, / 속리산은 단숨에 오를 수 있는 높이를 길게 길게 늘여서 내 앞에 펼쳐 주었다 (p. 94)
<북데일리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