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보면 어느 날 불현듯 또 다른 인생의 길 위에 놓이게 되는 경우가 있다. 지금까지 변함없이 걸어온 그 길은 친근하기에 익숙하며, 비록 성에 차지는 않지만 삶의 소소한 변화를 예측할 수 있어 좋다.
하지만 이제까지 가보지 않은 길을 가거나 가라고 하면 전혀 이야기가 달라진다. 막막하고 고통스럽다. 타인의 강요가 아닌, 자신의 결단에 의해 행해지는 선택은 더더욱 사명감 없이는 갈 수 없는 그런 길일 것이다.
그래서 범부와 의인의 구분은 나를 위한 것이냐, 아니면 우리를 위한 것이냐로 대별될 수 있다. 다름 아닌 박영석이라는 산악인 말이다. 그는 뼛속까지 닮고 싶은 선배이기를 바랐고 선배들에게는 예의바르고 겸손한 후배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2005년 세계 최초로 그랜드슬램(히말라야 14좌 완등, 7대륙 최고봉 등정, 지구 3극점 도달)을 달성한 그는 산악인 사이에서는 살아있는 전설과 같은 존재였다. 99%는 신의 뜻에 따라, 나머지 1%가 인간의 의지에 따라 하늘의 관문을 열어준다는 그 찰나의 시간을 열고 들어간 ‘행운아’였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오래전부터 꿈이 있었다. 가장 소중한 것은 마지막까지 남겨두는 법이라며,지금은 어쩔 수 없이 기록을 위해 남들이 만들어 놓은 길을 가지만, 그랜드슬램을 이루면 홀연히 ‘코리아 신 루트’를 개척해 한국인의 긍지와 산악인의 저력을 펼치고 싶다는 소망 말이다.
그는 자신의 뜻한 바를 한 치의 오차 없이 하나씩 하나씩 실행에 옮겼다. 4전 5기 끝에 드디어 2009년 5월 20일 에베레스트(해발 8850m)의 남 서벽과 서릉을 통하는 코리아 신 루트를 개척하는 쾌거를 이뤘다. 그리곤 가슴속에 품고 갔던 먼저 간 후배들의 영정을 다소곳이 그곳 그 위치에 올려놓고 못난 자기를 탓했다.
세상은 어두운 면이 있으면 밝은 면이 있기 나름이다. 아마 그 누군가 그 길을 오르며 지도에 선명하게 새겨진 코리아 신 루트를 따라 그들의 꿈을 이뤄 나갈 것이다. 그렇기에 그의 행동이 더 없이 아름답다. 그리고 오직 한 가지를 바랬다. 부디 여기까지만,더 이상 나서지 않기를.
하지만 그는 히말라야 3대 암벽 중에 하나인 안나푸르나(8091m) 남벽의 새 길을 만들려는 담대한 희망을 품고, 다시 그 길에 서고 말았다. 이 정도면 누군들 그의 고집과 집념을 내려놓을 수 있을까?
얼마 후 우리는 그와 두 대원의 실종소식을 듣고 또 한 번 기가 막혔다. 그들에게 실수는 있을지언정 후회는 없었다. 단지 우리에게 숙제를 남기고 잠시 사라졌을 뿐이다.
내년 봄부터 그와 두 대원의 마지막 모습을 끈질기게 찾는 것이 남겨진 우리의 숙제다. 어느 곳 어느 위치 어느 사선에 있던 대한민국 국민은 그들을 가족 품에 돌려보내는 전통을 굳건히 세워야 한다. 그래야 그가 남긴 ‘코리아 신 루트’가 진정 아름다운 길이 될 것이다. 술잔에 머무는 그의 겸손이 오늘 참 그립다.
칼럼니스트/aricom2@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