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희를 맞아 여는 이번 전시는 화업 40년을 중간결산하는 전시. 작가 스스로도 “내 생애 가장 큰 전시”라고 말할 정도로 최근 2년간 제작한 100호 이상의 대작 회화 50여점을 일제히 선보인다.
지난해 3월 고향인 강원도 춘천시 신동면으로 낙향해 작업실을 차리고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함섭은 “춘천으로 온 후 그림이 더 단순해졌다. 간간이 오방색을 쓰고 있긴 하나 자연의 색이 나도 모르게 깊이 스며들면서 화폭이 질박해지고 있다”고 밝혔다. 어린 시절 춘천의 황톳빛 언덕에서 뛰놀던 기억이 자연스럽게 발현되는 모양이라는 것. 때문에 출품작에선 흙내음이 느껴질 정도로 풋풋하고 너그러운 황토색이 주를 이루고 있다.
함섭은 작업할 때 붓을 사용하지 않는다. 불린 한지 더미를 화폭에 툭툭 던진 다음 솔로 일일이 두드려 붙이는 것. 또 닥종이의 원재료인 닥나무 껍질의 질박함을 곁들이기 위해 닥 껍질을 짓이겨 사용하기도 한다. 이런 재료들을 화폭에 던진 뒤 두드리는 작업은 마치 행위예술을 연상케 한다. 또 신들린 듯 화면을 두드리는 모습은 타악 연주자의 퍼포먼스 같기도 하다. 따라서 그의 작품은 작가의 의도와 우연성이 결합된 ’만들어진 그림’인 셈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탄생한 함섭의 회화는 일련의 추상적인 면들과 깊고 그윽한 색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며 우리 고향의 원초적 향수를 뿜어낸다. 간간이 더해진 오방색은 오색 빛깔이 나부끼던 서낭당의 모습이나 단청을 떠올리게 한다. 결국 한국의 작가만이 구현해낼 수 있는 우리의 진득하고 은근한 미감과 정서가 화폭 가득 넘쳐나는 것.
홍익대 미대에서 서양화를 전공했지만 함섭이 물감과 붓 대신, 한지 회화로 선회한 것은 남들과 다른, 자신만의 독자적 세계를 구축하고 싶어서다. 그는 또 “나이가 들면서 작품 속에 너무 많은 이야기를 담는 것 보다 큰 스님이 선문답하듯 모든 걸 함축적으로 담게 된다”며 "앞으로도 한지의 깊은 맛을 질박하게 표현하는데 더욱 힘을 쏟겠다"고 밝혔다. 일흔에 접어들었지만 "아직도 보여줄 게 많다"는 그는 75세까지는 대작 위주로 꾸준히 작업하겠다며 의욕을 보였다.
1990년부터 전업작가로 쉼없이 달려온 함섭은 “오늘이 내 남은 생애에서 내가 가장 젊은 날인 만큼 열심히 살아야 한다. ‘내일’에는 또 어떤 블랙홀이 숨어 있을지 모르니까”라며 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서울에서의 대규모 개인전과 함께 오는 13일부터는 미국 캘리포니아 카멜의 웨스트 브룩 갤러리에서 한 달간 초대전을 갖는다.
이영란 선임기자/yrlee@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