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재현은 장진을 두고 ‘연극계의 스필버그’라고 했다. 연극계에서 장진은 봉준호도 박찬욱도 아니고, 스필버그급이라고. 그는 장진 같은 감독 세 명만 있다면, 연극계 분위기가 달라지지 않겠느냐는 푸념 섞인 말도 덧붙였다.
창작극에 목마른 국내 연극계에 장진은 신화적 존재다. 대학로 무대에 장진의 이름 두 자가 걸리면, 유료 객석점유율 80% 이상은 거뜬하다. 실제로 2008년 ‘연극열전2’에 올린 장진의 ‘서툰사람들’은 전회(137회) 매진 신화를 기록했다. 하지만 국내 연극계에 장진 같은 검증된 티켓 파워를 지닌 연출가가 몇 명이나 될까. 제아무리 스타를 기용해도 작품이 좋지 않으면 흥행을 담보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연극계다.
장진과 조재현. 연극에 지극한 애정을 지닌 두 사람이 다시 뭉쳤다. 오는 12월부터 2013년 2월까지 대장정에 돌입하는 ‘연극열전’ 시즌4에 두 사람이 함께 참여, 다시 한 번 연극의 부흥을 꿈꾼다. 연극열전은 그동안 세 차례(2004, 2008, 2010)의 열전을 통해 100만 관객을 모은 연극계 히트상품. 대중성과 작품성 사이, 이 시대에 연극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왔다.
이번 시즌의 포문은 장진 감독의 ‘리턴 투 햄릿(Return To Hamlet)’이 연다. 2008년부터 연극열전의 프로그래머로 참여한 조재현은 시즌4의 콘셉트를 잡고 탄탄한 작품 6편을 모았다.
그동안 연극을 뿌리로, 영화를 만들어온 장진 감독. 방송, 문화계 전반에 걸쳐 활동하면서도 연극을 놓지 않는 조재현. 뮤지컬에 비해 밋밋하고 때로는 고도의 정신적 에너지와 집중력을 요구하는 연극에 이들이 빠진 이유가 뭘까. 지난 8일 서울 대학로 한 카페에서 두 사람을 차례로 만났다.
▶장진 감독 “연극으로 회귀본능, 마지막은 항상 연극”
“연극요? 어렸을 때 시작을 (연극으로) 세게 해서, 일종의 회귀본능이 있는 것 같아요. 아니, 사실 회귀의 수준도 아니지. 난 연극판을 떠난 적이 없는데요 뭘.(웃음) 나는 어디 있든 여기로 돌아와요. 내겐 숙제 같은 곳. 마지막은 항상 연극입니다. 영화를 하면서도 마음이 불안해서 이 바닥을 떠나지 못해요. 영영 이 동네를 떠난 사람이 될까 두려운 거죠.”
지난 2월 서울예대 연극동아리 30주년 기념공연 ‘로미오 지구 착륙기’를 올린 장진 감독이 신작 ‘리턴 투 햄릿’을 들고 관객들을 찾는다. 올해만 벌써 두 번째 연극. 그는 8년 만에 새로 쓴 희곡 ‘로미오 지구 착륙기’에 대해 “어떤 상업 연출가가 내 돈 들여서 60명의 배우와 신작을 올리겠느냐”며 “(세상을 떠난) 한 선배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한 작업”이었다고 했다. 죽은 선배와의 약속이라는 명분도 있었지만, 그는 “내가 뭘 하든 사람들이 나를 알아줘야 한다는 생각들이 이젠 지루해졌다. 일단 내가 만족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며 “그런 면에서 연극은 내면을 충족시켜주는 장르”라고 표현했다.
오는 12월 9일부터 내년 4월 8일까지 약 4개월간 공연되는 ‘리턴 투 햄릿’은 제임스 셔먼의 ‘매직 타임’ 원안을 빌려와 100% 새로 창작한 작품.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올리는 배우들의 백스테이지 풍경을 담았다. 연극쟁이들이 보여주는 연극쟁이들의 솔직한 뒷담화. ‘햄릿’을 한번도 안 본 초보관객들이 봐도 좋을 만한 작품이다. 장진 감독은 “재미와 풍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햄릿의 줄거리와 메시지가 함축적으로 담겨 있다”며 “셰익스피어 고전의 입문서로도 손색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영화감독으로 더 유명한 장진 감독은 사실 뿌리부터 ‘연극쟁이’다. 서울예대 연극과 재학시절부터 지금까지 쭉 했던 작품만 해도 영화보다 연극이 많을 정도. 그는 영화를 찍을 때도 연극 제작 시스템을 적용한 감독이다. 촬영 한두 달 전부터 모여서 리딩하고, 동선 짜고, 리허설하고, 완벽하게 장면을 완성한 뒤 촬영에 돌입한다. 장진 감독은 “영화는 미술, 영상 등 다양한 테크니션들이 참여해 완성하는 작품이지만, 연극은 오롯이 배우 중심적인 장르”라며 “나는 영화를 할 때도 연극 할 때와 같은 문법을 쓰는 감독”이라고 했다.
장진표 영화가 그렇듯, 장진표 연극 또한 색깔이 분명하다. 독특한 그만의 풍자와 패러디가 관객을 폭소로 몰고간다. 평소 대학로를 찾지 않는 이들도 장진의 연극이라면 “재밌겠다”며 공연장을 찾을 정도다. “솔직히 지난번 연극열전이 대박이 났다면, 이번에 참여 안 했을 겁니다. 2004년 첫 연극열전 때 손해를 보면서도 공연을 올렸던 그때의 초심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지금이 터닝포인트예요.”
그가 이토록 연극을 좋아하고, 많은 사람이 연극을 봐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뭘까. “내 꿈이 하나 있는데, 초등학교 정규 교과과정에 연극을 포함시키는 거예요. 연극은 철학적 고민과 종교적 구원까지 드라마틱하게 가르쳐주는 장르예요. 삶의 질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되는 매개입니다.”
▶조재현 연극열전 프로그래머 “연극은 수공업, 정(情)이 갈 수밖에요.”
배우 조재현은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다. MBC 드라마 ‘계백’에서 배우로 열연 중이며, ‘연극열전’ 프로그래머, 경기도문화의전당 이사장, 경기공연영상위원회 위원장 등 문화계 전반에 걸쳐 중책을 맡고 있다.
2004년 연극열전 시즌1에서 ‘에쿠우스’의 배우로 참여했던 조재현은 2008년 연극열전2부터 4년째 프로그래머로 참여, 오는 12월 시작되는 연극열전4의 전체 콘셉트와 작품을 선별했다.
이번 연극열전은 작품 수를 늘리는 것보다 양질의 작품을 선정하고 좌석 규모를 늘리는 방향으로 잡았다. 대학로 동숭아트센터, 세종문화회관 M시어터 등 400~600석 규모의 극장을 확보해 장진, 박근형, 김광보, 박인선 연출, 배우 차인표 등을 끌어모았다. 그는 “이번에는 최대한 현실적으로, 콘텐츠의 내실에 중점을 뒀다”며 “중극장 규모에 맞는 양질의 관객 확보를 목표로 세웠다”고 설명했다.
그동안 꾸준히 작품의 연출이나 배우로도 참여해온 조재현은 이번에 한 방송국 PD의 실화를 바탕으로 쓴 작품 ‘음악치료사’로 관객과 만난다. 작품은 교통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된 한 남자와 그를 치료하는 음악치료사가 음악, 대화를 통해 서로의 상처를 치유하는 모습을 그린다. 또한 그와 친분이 있는 배우 차인표가 3년 전에 쓴 소설 ‘오늘예보’를 무대에 올린다.
조재현이 푹 빠진 연극의 매력. 돈도 안 되고 생색도 안 나는 연극을 고집스럽게 하는 이유는 뭘까. “특별한 사명감은 아니에요. 다만 연극은 내가 뛰어들어서 노력하면 눈에 보이는 성과가 나오죠. 방송이나 영화는 나 혼자 좌지우지할 수 없잖아요. 똑같이 발을 담갔는데 내가 최선을 다한 성과가 다 보이니까 재미있습니다.”
그는 연극을 제작하는 과정이 일종의 가내수공업과 같다는 비유를 들었다. 작품을 올릴 때의 경건한 마음 또한 배우 조재현에게 짜릿한 자극이다. “연극은 배우의 경건한 마음가짐을 배울 수 있죠. 몇 달간 팀워크를 거쳐 무대에 올리는 그 마음. 대기업에서 자동차 만드는 식의 공정이 아니고, 일일이 손을 거쳐서 준비하는 수공업이죠. 그러니 애정이 안 가겠어요?”(웃음)
조민선 기자/bonjod@heraldcorp.com
사진=이상섭 기자/babtong@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