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르트르는 지식인을 ‘자기와 무관한 일에 참견’하는 존재로 정의한 바 있다. 이에 따르면 오늘날 지식인의 맨 앞자리에 놈 촘스키를 호명한다 해도 어색할 게 없다. 변형 생성 문법으로 언어학에서 ‘촘스키 혁명’을 이룩한 그는 늘 자신과 무관한 사회비판에 앞장서온 지식인의 표상이다.
촘스키의 강연과 기고문을 엮은 ‘촘스키, 희망을 묻다 전망에 답하다’(책보세)에서도 저자의 비판은 서릿발처럼 맵고 날카롭다. 그의 벼린 문장은 ‘팍스 아메리카나’의 이면을 집요하게 겨누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미국의 패권적 속성은 버락 오바마 정부에 들어서도 변치 않았다. 이는 오바마 인선의 면면만 봐도 드러난다. 부통령 조지프 바이든은 이라크 침공을 열렬히 지지했으며, 수석 보좌관을 지낸 람 이매뉴얼은 월가로부터 가장 많은 선거자금을 모은 인물이다. 오바마가 제시한 ‘담대한 희망’이란 백지수표는 그를 지지한 대중에게 부도수표로 돌아오고 있다. ‘납세자의 선물’로 월가의 탐욕을 채워주고, 팔레스타인의 주권은 묵살하면서 이스라엘의 살육은 묵인하는 등 앞선 정권의 과오를 답습하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민주주의라는 가면 뒤의 미국의 추한 얼굴을 드러내는 데에 주저함이 없다. 고문 기법 개발에 연간 10억달러를 투자하는 나라, 남미의 민주정부 대신 꼭두각시를 앉히는 나라가 과연 ‘아름다운 나라(美國)’인지 저자는 반문한다.
때로 그의 비판은 도덕적 이상에 가까우나 정치적 현실과는 멀게만 보인다. 하지만 그가 밝힌 불편한 진실에 애써 눈감아선 안 된다. “역사적 기억상실이 위험한 이유는 도덕적 지적 성실성을 훼손할 뿐 아니라 또 다른 범죄를 저지를 토대가 되기 때문”이다.
미국의 입장에선 사사건건 자국을 비판하는 성가신 지식인일 수밖에 없지만 미국의 양심은 분명 촘스키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
김기훈 기자/kihun@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