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통증으로 시작하며 통증으로 끝나기도 한다. 통증은 깊숙한 자아를 위협하며, 죽음을 예고하여 자아의 궁극적 사라짐을 일깨운다.”
인간의 삶에는 희노애락이 뒤섞인다. 그 생 안에서 받아들이는 기쁨과 즐거움은 짧지만 슬픔과 고통은 길다. 지리한 슬픔의 고통들은 때론 상처를 수반한다. 눈에 보이는 상처이건 눈에 보이지 않는 상처이건 통증을 동반한 고통의 자리는 쉽사리 아물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은 온전히 자기만의 몫. “통증은 내게는 언제나 새롭지만 지인들에겐 금세 지겹과 뻔한 일(알퐁스 도데)”이 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통증은 우리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웅변하는, 인간의 본질적 특징(21쪽)”이다.
통증학회의 최근 조사에 따르면 병원에서 치료 중인 통증환자 셋 중 하나가 바로 그것 때문에 자살 충동을 느꼈다고 한다. 내게로 향한 송곳의 날카로움은 오직 나만이 알 수 있는 법이다.
오로지 자기와의 싸움일 뿐이지만 숨쉬는 매순간 견뎌야 했을 인류의 통증연대기가 미국의 저술가인 멜러니 선스트럼을 통해 낱낱이 해부됐다. 이 안에는 역사와 의학, 철학, 종교, 문학, 심리학 등을 넘어선 통증의 대해부가 담겼고, 그것을 바라보는 시대별 관점과 통증의 역사, 관련 연구 성과, 통증 환자들의 경험담 등을 담고, 여기에 만성통증 환자인 저자 자신의 통증일기가 더해졌다.
바로 ‘통증 연대기’(에이도스 펴냄. 원제 ’The pain chronicles‘)다.
‘통증(pain)’의 어원은 ’처벌‘을 뜻하는 라틴어 ’포이나(poena)‘, ’갚다‘를 뜻하는 그리스어 ’포이네(poine)‘, ’지옥에 떨어진 영혼이 겪어야 하는 처벌과 고통‘을 뜻하는 고대 프랑스어 ’펜(peine)‘이다.
때문에 고대부터 근대 이전까지 통증은 “결코 단순한 몸의 경험이 아니며 의미와 은유로 가득한 영적 영역을 반영한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몸으로부터 겪는 육체적 고통이 아닌 정신을 넘어선 고통이라는 의미다.
실제로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는 날개를 활짝 펼친 마신(魔神)이 통증을 일으킨다고 생각했고 유대교와 기독교에서는 인류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뒤로 통증이 시작됐다고 말한다.
혼자 감당해야 하는 몫이 컸던 만큼 통증은 “긍정적인 영적 변화를 일으키는 힘”으로 간주되고 있기도 하다. 기독교와 불교를 포함한 수많은 종교 안에서 순례자와 고행자는 신에게 가까이 가기 위해 고통스러운 제의에 스스로 참여했고, 그 고통을 참아내며 보다 완성된 자신을 만나게 됐다.
통증의 의미가 보다 육체적인 관점에 근접하게 된 것은 19세기에 이르면서부터다. 이 때부터 통증을 단순하고 기계적인 감각으로 파악하는 생물학적 통증관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모든 통증은 신체를 보호하기 위해, 즉 조직 손상을 경고하기 위해 생기며 따라서 질병이나 부상을 치료하면 통증은 저절로 치료된다는 것. 하지만 이 같은 인식은 악화되는 만성 통증을 설명하지 못하는 맹점을 안고 있어 최근에는 새로운 통증관이 등장하게 됐다. 근대 이전의 통증관도 수용해 생물학적 요인만이 아니라 심리적인 요인도 함께 고려한 것이다.
‘통증 연대기‘는 이 같은 내용을 바탕으로 인류와 함께해 온 통증의 역사를 통해 그 함의를 다시금 인식할 수 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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