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이 이야기를 소설로 풀어볼까 마음먹은 것은 1993년 늦겨울 뉴욕의 어느 호텔에서였다. 일행 다섯이 한 달의 잔치 같은 뮤지컬 관람여행을 마치고 각기 일정에 따라 귀국하는데 그녀의 추억담이 끼어들었다. (중략) 그런데 작품 연재를 시작한 지 오래잖아 그녀가 갑자기 우리 사회의 문화적 아이콘으로 떠오르면서 내게 묘한 부담이 되었다.”
소설가 이문열의 ‘리투아니아 여인’(민음사)은 주인공이 누구를 모델 삼았는지 어렵지 않게 짐작이 간다. 이미 유명인사가 된 한 뮤지컬 음악감독을 소설로 그려내는 게 ‘작가의 말’을 빌려 털어놓지 않으면 안 될 만큼 작가 역시 부담스러워한 게 보인다.
소설은 한국인 아버지와 리투아니아 출신 미국인 어머니를 둔 코카서스 피가 흐르는 활달하고 자기세계가 뚜렷한 음악감독, 혜련의 얘기다.
지방 극단 연출가로 시작해 서울로 진출, 중견 연출가로 자리를 굳혀가는 나와 혜련은 어린 시절, 특별한 인연이 있다. 초등학생이었던 혜련은 당시 동네 또래들에게 집단따돌림의 상처를 입고 부모와 미국으로 들어갔다가 스물다섯 살의 여인으로 아버지 땅을 밟는다. ‘리투아니아 남자들’을 무대에 올리기 위해 음악감독을 모집하면서 만나게 된 혜련과 나의 관계는 연극을 매개로 끊어졌다 이어졌다를 반복하며, 그때마다 혜련의 특별한 가족사를 만나게 된다.
혜련의 가족사는 냉전시대 비극의 한 전형을 이루지만 혜련에게는 그다지 비극적이지만은 않다. 한국, 미국 어느 곳에도 정착하지 못하지만 혜련을 뜨겁게 만드는 것은 정체성보다 예술이다.
작가는 인종적 편견과 정체성, 예술의 보편성 등을 독특한 DNA를 지닌 한 여성을 통해 그려내 보인다.
장황하게 느껴지는 설명조와 헐거운 구조임에도 작가 특유의 끌고나가는 힘과 궁금증을 이어가는 전개 방식에 힘입어 열두 고개 넘어가듯 따라가는 소소한 재미가 있다.
이윤미 기자/meelee@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