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삶에 대해 “예스”라고 말할 수 있기를... 빅터 프랭클’ (522쪽)
<7년의 밤>(은행나무. 2011)의 정유정씨가 책 말미에 내놓은 말이다. 특이하게도 책날개에 작가에 대한 소개가 없다. 전남 함평 출생으로 오천만원 고료의 <세계청소년 문학상>, 2009년 <내 심장을 쏴라>로 1억원 제5회 세계문학상을 받았다는 얘기 밖에. 이후 2년간 침잠한 이후 나온 작품이 바로 이 책이다. ‘내 나이가, 내 출신이 당신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나를 보지 말고, 내 작품을 보아라.’ 그야말로 <내 심장을 쏴라>는 제목이 어울리는 작가다.
‘예리하고, 슬프고, 신비로운.’ 이 단어들을 엮어 치밀하고 조용하게 끈질기게 좁고 좁은 심연으로 몰고가는 이는 누구인가. 이 소설의 무대에 등장하는 사람들이다.
오영제. 지주의 외아들. 치과의사. 경계성 인격장애로 보일 정도로 집요하고 폭력적이며, 잔인함. 그의 아내와 딸 세령은 사육되고 ‘교정’되어야할 존재. 교정이란 주로 매와 으스스한 언어폭력. 이어지는 아내에 대한 성폭력, 딸에게는 충성의 다짐으로 이루어짐.
최현수. 가난한 집안의 장남. 무기력한 어머니를 대신해 술주정뱅이에 성격을 가늠할 수 없는 아버지와 동생 셋을 돌보며 학교에 다님. 야구에 타고난 재능이 있음. 집안을 일으켜야 하는 사명. 야구인생은 예상대로 풀리지 않음. 이유는 왼손에 주기적으로 오는 통증(용팔이)때문. 드세 보이는 아내에게 염증을 느끼는 한편, 일탈적 행동으로 그녀에게 복수하는 것이 익숙한 사람. 그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은 아들 서원으로 그의 목숨보다 귀한 존재.
안승환. 소설 한 편을 냈지만 그 이후 글의 광장에서 길을 잃은 사람. 서원과는 룸메이트이며 끝까지 지켜주는 보호자이기도 함. 최현수의 부탁으로 이 사건을 기록하며 작가로써 감각을 되찾게 됨.
최현수는 왼쪽 팔의 통증으로 야구팀에서 강판된 이후 온갖 일을 시도하지만 어느 하나 성공적이지 못했다. 술과 외박, 음주운전은 그의 일과였다. 그러던 중 아내로부터 세령 마을의 저수지 관리인으로 가자는 제의를 받는다. 세령 마을은 침수된 마을 위에 저수지가 들어섰다. 아내의 부탁으로 사택을 보러 가는 길에 사고를 내게 된다. 결과는 흰나비같은 소녀의 죽음이었다. 이미 아버지 오영제로부터 날개를 다친 소녀는 현수가 몰던 차에 치여 여린 목숨을 놓게 된다.
이후 벌어지는 오영제의 숨통죄는 복수극과 아들을 지키려는 최현수. 이에 더해 나머지 사람들의 싸움으로 점철된다. 죽음의 사신같은 오영제는 절대 타협하지 않는다. 동정은 물론 이해할 필요도 없다고 싸늘하게 말하는 듯하다. 악의 결정체인 그는 소설은 철저히 소설다워야 한다는 작가의 말을 대변하는 사람으로 보여진다. 무대는 어둠과 안개와 수초같은 죽음의 그림자로 덮혀있다. 소설의 배경은 한 번도 어둠 속에서 나온 적이 없을 만큼 밝음을 거부한다.
소설은 이들이 서로 겹쳐서 나타나기도 하고 쫓고 쫓기며 안개 속에, 나무 뒤에 숨어 훔쳐보기도 하고, 덫을 놓아 쓰러뜨리고 다치고 무너지게 하면서 수렁 속으로 끌고 들어가듯이 독자를 이끌어간다. 또한 ‘사랑’의 폭력성, 왜곡과 잔인함을 통해 인간이 얼마나 다양한 무늬와 배경을 갖고 태어나고 성장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장대한 스케일과 쉴틈 없이 긴장으로 독자를 조련할 줄 아는 작가 정유정. 그녀는 뭔가 달랐다. 책을 놓은 이후에도 그녀에 대한 궁금증을 참을 수 없었다. 인터넷에서 검색한 그녀는 간호사 출신이었다. 그녀의 삶 또한 반전이었다.
온갖 문학상 공모를 ‘미끄럼틀’인줄 알고 줄곧 떨어지거나, ‘개나 소나 소설 쓴다고 덤빈다’는 혹평을 받은 적도 있었다는 그녀는 이제 화려하게 부활했다. 오히려 이런 경험이 잔인함 속에 유머를 넣을 수 있는 노련함을 키웠을 터였다.
혹시나 이 소설을 읽고 이에 못지않은 공포소설을 읽고 싶어진다면 <폐허>(스콧 스미스>를 권한다. 아마도 이 작품과 쌍벽을 이룰 것이다. 아니 더할 수도 있겠다.
<북데일리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