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건우. 반백년 넘게 한 길을 묵묵히 걸어온 피아니스트의 이름 앞에는 ‘건반 위의 구도자’ 같은 수식어조차도 필요 없어 보인다. 이름 석자만으로도 충분하다. 백건우의 피아노 연주는 단순한 건반의 울림이 아니라 백건우의 인생관, 경험, 음악 철학을 아우르는 메시지다. 그 메시지를 구체적으로 듣고 싶었다. ‘백건우 리사이틀’을 앞두고 이태원 한 커피숍에서 그를 만났다. 백건우는 안단테(Andante) 같은 사람이었다. 여유롭고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낯섬’을 즐기는 백건우= ‘포토그래퍼’ 인생도 괜찮겠는데요?
백건우는 사진과 여행을 좋아한다고 했다. “카메라 렌즈를 통해서든 내 눈을 통해서든 무엇인가를 보고 느끼고 이해하는 게 좋아요. 모르는 나를 모르는 세계에 도착시키는 것. 언어나 지리를 모르는 곳에서 헤매기도 하면서 새롭게 삶의 열정을 느끼는 것이 얼마나 훌륭해요? 그래서 어떤 때는 언어를 모르는 나라에 가는 것이 더 즐거울 때가 있죠.” 그는 스스로에 대해 ‘궁금증’이 많은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하고 싶은 것’과 ‘할 수 있는 것’은 또 다른 문제라고 말했다. “인생이 짧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남은 인생을 어떻게 값지게 보낼 것인가’ ‘나한테 주어진 책임은 무엇인가’ 스스로 질문하게 되죠.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고, 그것이 다른 사람한테도 이득이 되는가 생각했을 때 나한테는 그게 음악이고 피아노였어요. 20대에 이 고민을 치열하게 한 이후로는 꾸준히 피아니스트의 길을 걸어왔던 것 같습니다.”
▶한 작곡가를 파고드는 이유=새로운 베토벤, 새로운 리스트는 존재한다.
백건우는 한 작곡가의 곡을 깊이 파고드는 연주자로 잘 알려져 있다. 베토벤 소나타 32곡을 일주일 만에 완주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하지만 그는 새로운 베토벤, 새로운 리스트는 항상 존재할 수 있고,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말했다. “곡 하나 안에서도 처음 주제를 두 번, 세 번 연주했을 때 연주자의 경험에 따라, 듣는 사람에 따라 다 달라요. 얼마 전, 이탈리아에서 라벨 전곡을 연주했어요. 라벨은 미국 데뷔 무대에서 이미 연주했었지만, 또 다른 느낌이었죠.” 백건우는 어떤 것이든 묘사가 가능한 소리의 세계가 참 신비스럽다고 했다. “새 작곡가의 작품을 하는 이유는 제 세계를 넓혀가고 싶기 때문이죠. 하지만 브람스를 한다고 해서 베토벤을 떠나고 싶은 건 아니에요. 베토벤 안에서도 늘 새로운 베토벤이 발견되기 때문이죠.” 그는 평생 그렇게 음악에 취해 사는 것 같다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후학 양성에도 많은 관심=음악가에게 ‘자신만의 소리’와 ‘열린 마음’은 필수
백건우는 한국의 젊은 음악가들이 세계적으로도 인정받고 있어 무척 자랑스럽다고 했다. 하지만 앞서 음악 인생을 걸어온 선배로서 걱정되는 부분을 덧붙였다. “제가 피아노를 시작했을 때와 비교하면 지금은 재능이 있으면 시작은 쉬울 수 있어요. 하지만 자기 재능을 자기가 키워나간다는 것이 참 어렵죠. 결국에는 ‘개인과 세계’의 싸움이니까요.” 그는 후학 양성에도 관심이 많다고 했지만 음악가들은 시골에서 농사짓는 분들께도 배울 점이 있고 외국 여행을 하면서도 배울 수 있다고 강조했다. 폭 넓은 경험과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키워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 때문에 하루 18시간, 20시간 피아노만 친다고 대가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콩쿠르 입상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기가 갖고 있는 음악이 어떤 음악인지 깨닫고 키우는 것’이죠. 피아니스트는 ‘자기 소리’가 있어야 하는데 이게 있는 사람이 있고 없는 사람이 있어요. 아름답다든지, 투명하다든지 자기만의 소리가 있어야 합니다.”
▶피아노에도 성격이 있다=연습은 ‘피아노의 성격을 파악하는 것’과 다름없어
백건우는 또 ‘피아노 성격론’을 언급했다. “세상 만물은 지구의 움직임에 영향을 받으면서 서로 연결돼 있는 것 같아요. 피아노와 연주자도 마찬가지고요. 연주회 때 쓰는 스타인웨이 피아노는 전 세계에 대략 60만대 가까이 있는데 모두 다 성격이 제각각이죠. 연주회 때는 어떤 악기를 만나는지, 또 연주하려는 작품과 연주 공간의 분위기가 어떤지 등 모든 면을 조화시켜야 해요. 악기에 따라 연주도 달라질 수 있고 핑거링도, 해석도 달라질 수 있으니 악기의 성격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죠. 그래서 연습을 멈출 수가 없는 겁니다.” 그는 또 자신의 연주도 결국 듣는 이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했다. “한 관객이 내 피아노 연주를 듣고 어떤 느낌을 처음으로 가져보게 됐다면 그 연주는 대성공이죠. 연주는 테크닉이 전부가 아니라 결국 조화예요. 매번 새로울 수 있는 이유지요.” 백건우는 올해 열었던 섬마을 콘서트처럼 다양한 방식의 연주를 통해 많은 사람들과 음악적 소통을 해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 ‘브람스 인터메조’ 앨범 발매한 백건우=브람스는 경상도 사나이 같은 은근한 매력이 있어
백건우는 오는 17일 오후 7시 고양아람누리 아람음악당(하이든 홀)에서 리사이틀을 연다. 이번 리사이틀에서 백건우는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 브람스의 인터메조 op. 117-1과 op.118-2, 카프리치오 op. 76-1, 리스트의 b단조 소나타 등을 연주할 예정이다. 이 중 브람스의 피아노 소품은 최근 레이블 도이체 그라모폰을 통해 발표한 새 음반 ‘브람스 인터메조’의 수록곡이다.
그는 브람스에 대해 “알면 알수록 깊이가 느껴진다”면서 베토벤은 듣자마자 확 와 닿는 것이 있는 반면 브람스는 들을수록 그 매력이 더해진다고 말했다. 이어 ‘무뚝뚝하지만 속정이 따뜻한’ 경상도 사나이 특유의 매력과 일맥상통할 수 있겠다면서 “‘브람스’하면 흔히 남성적이고 힘찬 이미지를 떠올리지만 피아노 소품에서는 따뜻함과 사랑스러움을 느낄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인터뷰 플러스
▶백건우와 윤정희의 다른점, 피아노와 영화의 공통점
백건우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영화배우이자 아내인 윤정희와 함께 인터뷰 장소에 모습을 드러냈다. 사진을 찍을 때 윤정희는 백건우의 옷 매무새를 체크하며 그의 몸 단장에 신경을 썼고 영화배우답게 적당한 각도와 포즈를 넌지시 알려주는 등 피아니스트 남편의 훌륭한 지휘자 역할을 했다. 세월이 흘렀지만 부부는 마치 소설 소나기의 소년과 소녀 같았다. 서로에게 무디지 않았고 세심한 관심을 기울이는 모습이었다.
이날은 또 윤정희가 LA 비평가협회 여우주연상에 오른 날이었다. 윤정희는 “이창동 감독과 방금 통화했어요. 영화배우로서 큰 영광이죠”라며 밝게 웃었다. 백건우는 영화 ‘시’이후에 아내가 영화배우로서 꾸준히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상황에 대해서 언급했다. “칸에 갔을 때는 제가 핸드백 들어주고, 제가 연주할 때는 아내가 연주복을 들어주죠. 둘 다 예술가라서 그런지 우리가 하는 작업이 미완성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아요. ‘도중’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누가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는 것에 크게 의식하지 않아요. 그런 가치관이 잘 맞아서 각자 색깔이 뚜렷하지만 문제없이 잘 지내는 것 같고요.” 그는 또 피아노와 영화가 어떤 부분에서 통하는지 묻자 영화와 피아노는 결국 똑같은 것 같다고 말했다. “음악도 영화도 휴먼드라마이기 때문이죠. 우리가 뭘 표현하겠어요? 결국 우리 속에 있는 걸 표현하는 거니까요.”
인터뷰가 끝날즈음 백건우는 아내를 향해 “여보, 스카프 길이가 맞지 않는 거 같아요”라고 말했고 윤정희는 “호호, 그래요?”라며 스카프를 매만졌다. 윤정희는 남편을 바라보며 “브람스 인터메조 앨범, 많은 사람들이 듣고 좋은 느낌 함께 나눌 수 있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했다. 이날만큼은 영화배우 윤정희가 아닌 백건우의 아내이자 열혈팬으로 완벽 변신한 모습이었다. 부부는 색깔이 달랐지만 각자의 색깔이 더 선명하게 빛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안단테(Andante) 같은 피아니스트 백건우와 스타카토(Staccato)처럼 여전히 통통 튀는 매력을 발산하는 영화배우 윤정희는 서로 그렇게 악보 밖에서도 화음을 이뤘다.
황유진 기자 / hyjgogo@heraldcorp.com
사진=박해묵 기자/mook@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