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을 잃은 절망속 두 남자
100년 시공 뛰어넘은 슬픔의 소통
고통으로 꽉 찬 40대의 멜랑콜리
그들을 어루만지는 언어의 위무
“상처에 대한 얘기예요. 모두가 상처가 있잖아요. 우리 안의 것밖에 들여다보지 못하는데 다른 사람의 상처, 상처와 상처 간의 커뮤니케이션이랄까.”
올 초 시집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으로 10년 만에 고국땅을 밟은 시인이자 소설가인 허수경이 이번엔 장편소설 ‘박하’(문학동네)를 들고 다시 찾았다.
독일 뮌스터대에서 고고학을 전공, 박사과정을 마친 작가는 이번 소설에서 시간의 존재를 확인시켜주는 땅의 단층처럼 인간의 어쩔 수 없는 존재감을 보여주는 아픔과 상처, 고통의 켜를 조심스럽게 드러내 보여준다. 상처를 다루는 그의 손길은 유물을 다루는 붓질만큼 부드럽고 세심하다.
이야기는 사고로 아내와 두 아이를 잃고 절망에 빠진 이연이란 한 사내와, 20세기 초 중국에서 고아로 발견돼 독일인에게 입양된 고고학자 이무의 얘기가 교차된다. 이연은 라면과 담배로 시간을 때우며 자살을 꿈꾸다 문득 선배 마준이 출판해보라며 주고 간 노트에 눈길이 간다. ‘이무(李無) 혹은 칸 홀슈타인의 기록-1902년 봄에서 1903년 겨울까지’라고 쓴 노트의 시작은 이렇다.
“나에게, 내가 이 글을 읽을 때 나는 이미 모든 것을 잃고 난 뒤일 것이다. 너에게, 나는 다시 태어나고 싶다, 너에게로 가기 위해.”
이무의 기록에는 미지의 도시 하남이라는 고대 도시를 찾아가는 여정이 담겨 있다. 이무는 도시와 같은 이름을 가진 노마드 여인 하남을 만나게 되고, 그와 사랑에 빠진다. 이연은 그 기록을 읽으며 이무와 자신, 또 이무와 마준을 동일시하게 된다.
허 씨는 소설을 “6년 전 히타이트 왕국의 수도였던 터키의 하투샤라는 도시에 발굴을 위해 머물면서 구상하게 됐다”고 했다. 발굴지에 오랜 야생박하 군락지가 있었는데, 그 향기가 언젠가 향기에 대한 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환기시켰다는 것.
허 씨는 “고고학과 문학은 모두 시간 앞에서 많은 사유를 하게 만든다”며, 현장 발굴에 나서다 보면 500년의 시간이 2m 땅의 두께로 나타나는 걸 보고 낯설고 힘든 마음이 들기도 한다고 털어놨다.
문학에 내재된 감성과 신화가 땅의 실재 앞에서 무너져내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둘은 사유를 통해 하나가 된다.
장편소설‘ 박하’의 출간차 고국을 찾아 한 달간 머문 소설가 허수경 씨는 “고향이라고 생각되는 곳이 있다면 글을 쓰기 위해서 앉아 있는 공간일 것”이라고 말했다. |
허 씨에게 소설 쓰기는 언어공동체의 말의 감각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한 과정이다. “소설 속의 언어는 조그만 물고기까지 끌어올리는 작업이에요. 언어감각을 잃어버리지 않는 일은 목숨과도 같이 중요한 일이에요.”
그 언어의 바다에서 허 씨가 찾아내 이번 소설 짓기의 주춧돌로 삼은 말은 ‘멜랑콜리’다. 고향을 떠난 디아스포라적 감상으로 여겨질 수 있겠지만 작가는 이를 더 멀리 밀고 간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감상적이라고. 멜랑콜리란 한 인간을 이해하려는 방식이라는 것. 소설은 특히 40대 중반 남자의 감상에 주목한다. 슬픔의 이유가 온몸에 꽉 차 있는데 슬픔을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나이. 그들의 마음을 작가는 조심스럽게 열어젖혀 슬픔을 숨쉬게 한다.
허 씨의 이전 소설과 달리 편하게 이야기를 따라갈 수 있다. 고고학자의 시계답게 한 세기 전 이무의 기록이 더 디테일하고 긴장과 생동감이 느껴진다.
이윤미 기자/meelee@herald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