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기퍼도 오지 않었다./스물세햇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드라.”
연극배우 손숙 씨는 평소 미당 서정주의 시 ‘자화상’을 자주 암송한다고 했다. 그의 또렷한 목소리가 동국대 이해랑예술극장의 넓은 공간을 울리며 “스물세햇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고 시어를 찍어내자 객석은 고요했다.
이어 배우 박정자가 화려한 목소리로 미당의 아름답고 징그러운 베암 ‘화사’를 낭송하고, 배우 전무송은 시 ‘문둥이’ 앞에서 깊은 숨을 토해냈다. “해와 하늘 빛이/문둥이는 서러워//보리밭에 달 뜨면 애기 하나 먹고//꽃처럼 붉은 우름을 밤새 우렀다”.
올겨울 들어 가장 추웠던 26일 밤, 동국대 이해랑예술극장에서 열린 미당의 ‘화사집’ 발간 70주년 기념, 시낭송회는 시가 있어야 할 곳을 새삼 깨닫게 했다. 스물세 살 청년 미당이 내면의 들끓음을 어쩌지 못해 토해낸 24편의 ‘화사집’은 ‘시원의 신대륙의 발견’으로 불릴 정도로 우리 시문학사상 뚜렷한 이정표를 세운 시집이다. 이번 낭송회에선 시집에 실린 전편 24편을 국내 내로라하는 연극배우들과 시인들이 한 편씩 낭송했다. 손숙, 박정자, 전무송, 박웅, 정경순, 이정섭, 김지호, 김성녀 등 연극배우들과 이근배, 김남조, 유안진, 신달자, 문정희, 허영자, 장석남 시인 등 면면들이 이보다 더 화려할 순 없다. 객석은 저마다 미당의 시 한 자락씩 품고 있는 시 애호가들로 훈훈했다. 시는 들어야 맛이다. 시의 색깔, 정조를 따라 낭송하는 시는 마음속에 깊이 스민다.
최근 낭독공연이란 장르가 생길 정도로 낭독이 대세다. 소설가 박완서의 단편소설 ‘여덟 개의 모자로 남은 당신’ 등 4편의 작품을 배우의 낭독과 연기로 감상할 수 있는 공연도 있다.
낭독의 재발견은 대산문화재단의 공이 크다. 작가와 독자의 소통의 자리로 2006년 처음 문을 연 ‘낭독공감’은 격월로 꾸준히 진행해오고 있다. 지난달 소설가 신경숙 씨의 ‘모르는 여인들’ 낭독의 자리엔 500여명의 독자가 신청할 정도로 관심이 높았다.
낭독의 가치는 무엇보다 공감에 있다. 특정한 시간과 공간, 언어가 만들어내는 집 속에서 함께 호흡하는 것이다. 때로는 내 아픔이 하나의 문장이나 시어에 실려 분출돼 나오기도 하고, 주위에 대한 따뜻한 온정이 안에서 차오르기도 한다.
올해 출판, 문학의 공통된 키워드는 위로와 공감이다. 그 맨 위에 김난도 서울대 교수의 에세이 ‘아프니까 청춘이다’가 있다. 그 밑에 깔린 건 눈물이다. 청춘들은 ‘아프니까’ 그말 한마디에 그냥 무너졌다고 했다. “그래, 네 맘 안다” 정도만으로도 통했다는 얘기다. 아픔을 위로하고 치유하는 데 문학이 가장 직접적이란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문학치유전문가인 이봉희 교수는 “삶의 중요하고 절실한 순간에 듣고 읽는 시 한 구절, 음악 한 소절은 우리의 내면에서 우리를 초대하는 목소리입니다. 이 시를 읽을 때 우리는 단순히 글자에 목소리를 입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영혼에 목소리를 주는 것입니다”고 했다. 위로와 공감은 점점 팍팍해지는 현실에서 더 절실해 보인다. 낭독의 시간이 늘어나야 하는 이유다. meelee@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