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디폴트 공포 그리스 넘어스페인·포르투갈로 확산
EU 성명도 고육책 불과
유로존은 복잡한 퍼즐상자
한국이 외환위기로 고통받던 1999년의 일이다. 프랑스를 기점으로 남유럽을 도는 출장이었다. 첫 여장을 푼 파리의 한 호텔에서부터 문제가 발생했다. 객실 미니바에 큰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이유인즉슨 전날 투숙한 중국인 단체여행객들이 미니바를 훑고는 요금을 내지 않고 떠났다는 것이다. 우리는 한국인이라고 거듭 말했지만 그날은 끝내 열리지 않았다.
그리스 공항에서는 더했다. 평소 얼굴이 동남아(?)스럽던 일행 중 한 명이 뒤늦게 검색대를 통과하다 일이 터졌다. 공항보안요원의 총부리에 밀려 정말 공항 한쪽의 동남아인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끌려갔다. 가이드의 도움으로 돌아오긴 했지만 그는 자신이 왜 그런 대우를 받았는지 영문을 몰라 했다. 당시 우리 일행은 한국이 외환위기를 겪으니 이런 수모를 당하는 게 아니냐고 한마디씩 했던 기억이 난다.
국력이 약해지면 국민은 나라 안팎에서 힘들어진다. 더군다나 한때 세계를 호령했던,혹은 문명의 발상지라면 상대적 박탈감은 더할 것이다. 유럽은 현재 그리스에 이어 디폴트의 공포가 포르투갈과 스페인으로 옮아가는 양상이다.
그리스의 새 총리는 지금껏 겪어보지 못한 고통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의지를 다잡았지만 정작 문제는 국민이다. 그런 고통을 감내할 준비가 돼 있느냐는 점이다. 벨기에는 지난달 30일 EU 특별정상회의가 열리는 날에 맞춰 긴축정책에 항의하는 총파업을 벌였다.
사실 한국이 IMF 체제에서 달러를 원조받는 대가는 가혹했다. 그리스 정부가 2차 구제금융을 받기 위해 민간 채권단과 채무교환 협상을 진행 중인데 우리에게는 그런 기회조차 없었다.
대우, 한보 등 대기업이 줄도산하고 금융권의 거대한 구조조정 속에서 많은 국민이 일자리를 잃었다. IMF 세대라는 말은 아직도 우리 사회에 회자된다. ‘뼈를 깎는’은 말 그대로 큰 고통이지만 우리는 구조조정 과정에서 일상 용어처럼 사용됐다.
홍콩의 월간지 ‘월간 신보’는 최근 발매한 2월호에서 “한국민들의 자발적인 금 모으기 운동이 깊은 인상을 남겼다”면서 유럽 금융위기 극복을 위해 한국의 경험에 주목하라고 조언했다.
그리스는 최근 국치일로 기록될 정도의 수모를 당했다. 독일이 그리스에 재정주권 이양을 요구하고 나선 것. 그리스가 “그런 제안은 역겨운 상상력의 산물”이라며 격하게 반발하자 독일이 한발 물러서긴 했지만 그리스가 강력한 경제개혁 가능성을 보여줘야만 자금을 지원할 수 있음을 분명히 했다. 밑 빠진 독에 힘 들여 벌어들인 유로화를 쏟아부을 수 없다는 독일 국민의 정서를 대변한 것이다.
지금의 유로존은 난맥상의 연속이자 매우 복잡한 퍼즐 상자와도 같다. 메르켈 총리는 강력한 긴축을 요구하지만 조지 소로스는 긴축보다는 더 많은 경기부양책을 써야 한다고 주문한다.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은 금융거래세를 당장 8월부터 도입하겠다고 천명했지만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는 “미친 짓”이라고 비난했다.
27개 EU 회원국 정상들이 이번에 특별히 만나 내놓은 성명 역시 고육지책에 지나지 않는다. ‘일자리를 창출하는 성장친화적 재정건전화’라는 성명 자체에서부터 요원함이 느껴진다. 성장과 재정,두 마리 토끼를 잡겠다는 것인데, 지금 유로존의 현실에서는 힘겨울 뿐이다. 유로존의 해법은 그래서 어렵다. 아니 해법은 많지만 선택이 어려운 것이 바로 유로존의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