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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헤럴드 포럼 - 박종구> 王安石이 재삼 생각난다
북송의 개혁가 왕안석
탄탄한 나라살림 바탕
백성 구하려던 희대의 異人
복지의 단초 그에게서 구하길


복지가 시대적 화두다. 올해 복지예산이 92조6000억원에 달하고, 총지출 대비 복지지출 비중도 2007년 25.8%에서 올해 28.5%로 늘어났다. 정부가 나름대로 국민 복지와 사회안전망 확충을 위해 노력한 흔적이 역력하다. 문제는 선거를 앞두고 과도한 복지 담론이 곳곳에서 분출되고 있다는 점이다. 보편적 복지, 무상 복지, 평생 복지 등 표현은 다르지만 결국 혜택 수준과 수혜자 층을 대폭 늘려야 한다는 점에서는 큰 차이를 발견하기 어렵다. 그러나 복지 확대는 재정 확대와 맞물릴 수밖에 없다. 유럽의 재정위기도 결국은 과도한 복지국가 구현의 부작용이고, 지금 그리스 스페인 이탈리아가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다.

나라의 곳간을 지키고 국가의 생존과 발전을 위한 재정개혁은 어느 시대, 어느 체제에서도 피할 수 없었던 국가적 과제였다. 이런 점에서 북송(北宋)의 위대한 개혁가인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은 시대를 넘어서 우리에게 커다란 교훈을 던져준다. 중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개혁을 통해 국가재정을 살찌우고 백성을 구제하려 했던 그의 노력은 1% 대 99%로 대변되는 심각한 우리 사회 양극화와 빈부격차 문제 해법의 단초를 제공한다.

그의 개혁은 철저히 ‘애민(愛民)’과 ‘현실 직시’에서 출발한다. 안석은 신종(神宗)황제의 부름을 받아 제치삼사조례사라는 개혁부서를 설치하고 균수법, 청묘법, 모역법 등 강도 높은 개혁조치를 연이어 실시한다. 이들 조치의 성과는 당시뿐 아니라 지금도 격렬한 논쟁거리가 되고 있지만, 그의 진언대로 신법이 차질 없이 시행되고 신법파와 구법파 간의 격렬한 정치투쟁이 이어지지 않았다면 북송은 국가재건에 성공했을 것이고 수치스럽게 황제가 납치되고 왕조가 강남으로 남하하는 비극은 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역사에 ‘만약’이라는 가정은 의미가 없지만 말이다.

안석은 제도와 정책의 성패는 결국 사람에 달렸다고 봤다. 북송은 시부(詩賦) 위주의 과거제도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안석은 이를 통해서는 국가에 필요한 인재를 확보하기 어렵다고 봤다. 중국의 과거제도가 사회 발전을 저해하고 관료주의와 부패의 온상이 됐다는 점에서 안석의 무서우리만치 냉정한 현실인식이 엿보인다.

또 안석은 ‘국가개혁=재정개혁’이라는 확고한 입장을 가졌다. 그의 개혁조치는 대부분 국가의 재정을 튼튼히 하고 백성의 고통을 덜어주는 데 역점을 뒀다. 오늘날 복지 포퓰리즘, 재정 포퓰리즘에 대한 우려도 결국은 재정이 안정된 국가질서의 기초임을 잘 보여준다.

안석은 과감한 개혁을 추진했지만 결코 배타주의자는 아니었다. ‘무엇이 고통받고 있는 백성을 구제하고 누란의 위기에 처한 나라를 살릴 것인가’라는 고뇌가 그를 완고한 독선주의자로 각인시켰지만, 그는 따뜻한 심성을 가진 휴머니스트요 가정적인 사람이었다.

마지막으로, 안석은 진퇴를 분명히 함으로써 후대 공직자의 모범을 보였다. 개혁안을 황제에게 헌책해 개혁의 부름을 받아 온몸을 던졌지만, 시대가 그를 부담스러워하자 과감히 낙향했다. 낙향한 안석은 경건한 불교도로 귀의했고 임종 시까지 세속을 초월한 삶을 살았다. 임종을 앞두고 자신의 저택을 절에 기부한 것은 그가 물욕에 물들지 않은 진정한 선비요 사대부임을 보여주는 증거 아니겠는가. 안석은 소동파(蘇東坡)의 말처럼 정말 희대의 이인(異人)이었다. 인재는 비방하는 사람이 많은 법. 안석이 재삼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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