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에서 차관(次官)의 권한이 강화되기 시작한 것은 조선 태종 때다. 고려 때도 육부(六部)의 수장인 상서(尙書) 다음 직위로 시랑(侍郞)ㆍ총랑(總郞)ㆍ의랑(議郞) 등이 있었지만, 상서의 품계가 정3품에 불과하다보니 차관 역시 권한이 크지 못했다. 그런데 조선이 들어서면서 육조(六曺)의 수장인 판서(判書)를 정2품으로 높이면서 차관인 참의(參議)의 품계도 고관급인 정3품 당상관(堂上官)으로 격상된다. 특히 태종은 1416년에는 육조별로 두 명 씩 두던 차관, 즉 참의를 한 명의 참판(參判)으로 줄이고 품계도 종2품으로 한 단계 높인다. 1414년 태종이 실시한 왕권강화책인 육조직계제(六曹直啓制)를 강화하기 위한 조치라는 게 정설이다.
당쟁의 폐해를 줄이기 위해 탕평책(蕩平策)을 펼친 영조는 판서와 참판을 각기 다른 당파에서 등용하는‘쌍거호대(雙擧互對)’ 원칙을 세운다. 견제를 통해 당파간 대립을 상생으로 승화시키기 위한 방법이었다. 달리 해석하면 차관인 참판의 권한이 장관인 판서를 견제할만큼 강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슬픈 역사지만 구한말 대한제국은 역사상 가장 차관의 권한이 강한 시기였다. 일제는 초기 통감부(統監部)를 두고 고문(顧問)을 통해 내정에 간섭했는데, 1907년에는 각 부처별로 조선인 장관 밑에 일본인 차관을 두는 정미7조약을 강제한다. 이전 고문정치는 그래도 형식상 ‘컨설팅’이었지만, 차관정치가 도입되면서 아예 노골적으로 권력을 빼앗은 셈이다. 이처럼 우리 역사에서 차관은 정치권력의 변화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했던 자리 가운데 하나였다.
7일 이명박 대통령은 남주홍 주(駐)캐나다 대사를 국가정보원 제1차장에 내정했다. 해외, 대북정보 수집 및 분석, 산업스파이 관련 국제범죄 정보를 담당하는 사실상의 국정원 차관이다. 그런데 남 내정자는 이번 정부 초기 통일부장관 후보에 올랐다 낙마한 이력이 있어 ‘회전문 인사’라는 평가가 나오며 차관정치의 부활이라는 비판이 있다.
실제 현 정부에서는 ‘강부자ㆍ고소영’ 인사로 적잖은 정권 측근들이 인사청문회의 벽에 부딪혔다. 그래서 ‘정치인 장관+실무형 차관’이 대부분이던 이전 정권과 달리 현 정권에 달리 정무형 차관들이 많았다. 이 가운데는 장관까지 승진한 이주호 교육과학기술부 장관, 야당의 거센 반대를 뚫고 청와대 민정수석(차관급) 출신으로 법무장관에 오른 권재진 장관 등도 있다.
하지만 SLS그룹 로비사건으로 구속된 신재민 전 문화부차관과, 이른바 ‘왕차관’으로 불렸다 ‘파이시티’ 인허가 비리에 연루돼 구속된 박영준 전 지식경제부 차관의 사례도 있다. 공교롭게도 박 전 차관은 남 내정자 발표가 있던 날 구속수감됐다.
임기말 대통령이 힘이 빠졌다는 평가가 많다. 하지만 헌법상 아직 9개월여 남은 기간동안엔 그래도 국정최고책임자로서 역할을 다해야한다. 그런데 정치에서는 인사가 만사다.
논어(論語) 태백(泰伯)편에서 증자(曾子)는 ”새도 죽을 때가 되면 울음소리가 구슬퍼지고, 사람도 임종이 다가오면 마음이 선해진다(鳥之將死 其鳴也哀, 人之將死 其言也善)”라고 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도 있다. ‘끝이 좋으면 다 좋다(All‘s Well That Ends Well)’
홍길용 정치팀장/kyhong@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