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 P는 대학을 나온 실직 인텔리로서 극도의 빈곤에 시달린다. 구직을 위해 동분서주하던 P는 어느 날 신문사의 K사장을 찾아가 채용을 부탁하지만 거절당한다. K사장은 P에게 도시에서 직장을 구할 것이 아니라 농촌에 가서 봉사 활동이나 하라는 동문서답격의 충고를 한다. 당장 먹을 것마저 없는 P는 K사장의 말이 ‘엉터리없는 수작’임을 절감하면서, 인텔리를 양산하고는 외면하는 역사와 사회를 원망한다.’
이는 1934년 발표한 채만식의 단편소설인 ‘레디메이드 인생’의 줄거리 한 부분이다. ‘레디메이드 인생’에서는 과잉 공급된 지식인들이 아무 쓸모없는 고등실업자로 전락해버린 현실에 대해 자조한다. 학위공장에서 쏟아져 나와 팔리기를 기다리는 물건과 같은 좌절한 인텔리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최근 통계청이 발표한 청년 실업률은 8.5%이다. 하지만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잠재적 실업률을 포함하여 실제로는 20%가 넘는 것으로 보고 있다. 2012년 5월 현재 우리나라 대졸 인텔리들이 처한 현실이다. 우리 사회는 대학을 나와야 사람 구실하고 성공한다는 인식이 진리처럼 자리 잡았다. 대학 졸업장이 없으면 인생 낙오자인 것처럼 취급했다.
사실 4년제 대학을 나오면 취업걱정 정도는 하지 않아도 되었던 이른 바, ‘학위효과(sheepskin effect)’가 통했던 시절도 있었다. 필자가 대학에 다니던 시절에는 연중 계속되는 데모로 인해 대학 정문을 닫아걸기 일쑤였고, 학생들은 음악다방이나 포장마차를 전전하며 4년의 세월을 보내고 졸업했다. 그래도 대학 졸업장만 내밀면 대부분 원하는 직장에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대졸자가 많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꿈같은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취업문을 두드리다 좌절을 거듭하고 있는 청년실업자의 마음에 칠전팔기(七顚八起)라며 도전을 부추기는 것도 한두 번, 칠전팔도(七顚八倒)가 현실이고 보니 이제는 딱히 뭐라 위로하기도 어렵다.
고등교육을 받았지만 그에 걸맞은 직업을 갖지 못하고 고용시장 밖을 서성이는 이들을 바라보면서 ‘2012년 판 레디메이드 인생’의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내 자식의 일이고, 친구 아들의 현실이다. 얼마 전 모 방송사 설문조사 결과 우리나라 초등학생의 장래 희망 직업 1위가 공무원이었다고 한다. IMF를 지나 세계금융위기까지 경제침체기를 겪으면서 장래 직업에 대한 불확실성과 두려움이 초등학생들에게 까지 투영된 듯하다. 꿈 많은 동심이 벌써부터 어른들의 고민을 이어 받은 것 같아 씁쓸하다.
청년실업 문제는 지구촌 전체를 덮고 있는 먹구름이다. 거기에 더해 우리나라의 청년실업에는 구조적인 문제가 또 하나 있다. 우리나라의 대학 진학률은 세계 1위다. 고졸자의 82%가 대학에 간다. 고등교육을 이수한 이들의 눈높이가 높아지는 것은 당연하다. 지난 3월 현대경제연구원의 ‘청년 일자리 창출을 위한 8대 정책과제’ 보고서에 따르면, 학력과 일자리간의 미스매치가 얼마나 심각한지 알 수 있다. 우리나라 청년취업자(15~29세) 학력별 공급-수요에서 대졸 학력자는 215만 여명에 달하는 반면, 대졸이상 일자리는 115만 여개로 무려 100만 명이 초과 공급 상태다. 반대로 고교이하 졸업자 176만 명에 비해 일자리는 276만 여개로 100만 명이 부족하다. 구조적으로만 보더라도 수요와 공급의 균형 잡힌 셈이 나오지 않는다. 그러니 이러한 틀 안에서 일자리 매칭을 위한 완벽한 대안이 나올 리 없다. 산업구조에서 그만큼의 양질의 일자리가 확보되지 않는 이상 양자 간의 차이는 곧 실업문제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다행스런 것은 최근 번지고 있는 ‘고졸취업’과, ‘선취업 후진학 고용생태계 조성’ 등은 학력인플레 현상을 깨기 위한 좋은 시도라고 볼 수 있다. 우리 청년들이 레디메이드 인생에서 벗어나 마음껏 꿈을 펼칠 수 있는 날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