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뉴욕공공도서관(NYPL)이 보유한 300만 권의 책들 가운데 반을 다른 곳에 마련한 창고로 내보내고 그 공간은 인터넷 카페와 같은 ‘공동체 공간’으로 만들기로 결정했다. 사람들이 지식을 얻는 일에서 책의 비중은 점점 줄어들고 인터넷의 비중은 빠르게 늘어나는 현실을 반영한 것이다.
물론 전통적 도서관의 모습에 애착을 품은 사람들의 반론도 거세다. 그러나 새로운 환경에 대한 적응이라는 점에서, 도서관의 이런 변모는 자연스럽다. 이미 많은 도서관들이 종이 책들을 창고로 옮기거나 스캔해서 전자적으로 보관하고 책들은 처분했다. 그렇게 얻어진 공간은 ‘킨들’과 같은 전자책(e-book)들로 채웠다. 도서관의 본질적 기능이 사람들에게 지식을 제공하는 일이므로, 이런 변신은 도서관을 도서관답게 만들려는 노력이고 좋은 평가를 받아야 한다.
도서관의 역사는 오래다. 문자가 발명되면, 도서관은 자연스럽게 나온다고 할 수 있다. 문자의 본질적 기능이 정보의 체외 저장이므로, 그런 정보들을 보관하고 검색하기 편리한 시설이 나오는 것은 필연적이다. 그런 시설은 처음엔 정부의 기록보관소(archive)의 모습을 했고, 저술 활동이 늘어나면서 차츰 일반인들이 이용하는 도서관(library)으로 진화했을 것이다.
가장 오래된 도서관은 아씨리아 제국의 위대한 통치자 아슈르바니팔이 기원전 7세기에 수도 니네베에 모은 방대한 설형문자 기록들이다. 비록 기록보관소의 성격을 짙게 띠었지만, 수장된 기록들이 그렇게 전반적이라는 점에서 그의 기록 모음은 도서관의 면모도 갖췄다.
고대에서 가장 웅장했고 명성이 높았던 도서관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었다. 융성기에 이 도서관은 50만 권이 넘는 책들을 보유했다고 한다.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 의해 기원전 3세기에 건립되고 왕실의 비용으로 유지된 이 도서관은 자매 기관이었던 박물관과 함께 서양 고전 시대에서 지식과 학문에 좋은 환경을 제공했다. 이 시기의 유명한 학자들과 저술가들이 대부분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과 박물관에서 활동했다.
동양에선 도서관이 발전하지 못했다. 기원전 3세기 말엽 중국을 통일한 진의 시황제는 ‘분서갱유(焚書坑儒)’로 상징되는 지식 통제 정책을 실시했다. 통치에 필요하거나 도움이 되는 지식들과 백성들의 생업에 필요한 실용적 지식들만 허용되고 다른 모든 지식들은 억압되었다. 그런 전통은 엄격한 신분 제도를 유지하면서 학자-관료 계급이 권력을 독점한 중국 사회에서 점점 굳어졌다.
우리나라에도 그런 제도들이 그대로 도입돼 사회에 존재하는 지식의 폭과 깊이를 극도로 제약했다. 당연히 사고(史庫)와 같은 기록보관소들은 유지돼지만 일반 백성들이 지식에 접근할 수 있는 도서관은 도저히 나올 수 없었다. 이런 역사적 사정은 아직도 공공 도서관의 발전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
이제 우리 사회의 도서관들도 더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도록 변신해야 한다. 아무리 건물이 웅장하고 서가에 꽂힌 책들이 많아도 사람들이 찾지 않는다면 그 도서관은 넋이 사라진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신의 뜻을 보다 잘 깨달아 자신의 삶을 보다 낫게 만들려는 소망을 품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없다면, 고색창연하고 웅장한 대성당도 그저 건물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