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 교과서에 임진ㆍ병자 양 란(亂) 이후 조선후기 세제와 관련된 ‘삼정의 문란’이 나온다. 영ㆍ정조 때 개혁하려했지만 근절되지 못하고 세도정치 때까지 가혹한 세금이 이어져 결국 조선이 국권을 빼앗긴 경제적 이유가 된다. 그런데 감사원이 23일 발표한 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 감사결과를 보면 주체가 정부에서 금융기관으로 바뀌었을 뿐 마치 삼정문란이 부활한 듯 하다.
학력에 따라 대출조건을 달리하는 것은 양반과 향리, 공노(公奴)에는 세금을 면제하고 농민에만 세금을 부과하던 족징(族徵)을 떠올리게 한다. 죽은 사람에게 카드를 발급한 것은 죽은 사람에 세금을 부과한 백골징포(白骨徵布)와 다름 없다. 수익을 더 내려고 대출금리를 조작한 것은 아이를 어른으로 둔갑시켜 세금을 메긴 황구첨정(黃口簽丁)이라 할 만하다. 보험사들은 자기 배를 불리려고 보험료를 부풀린 것은 세금을 과다징수한 도결(都結)과 닮은 꼴이다. 증권사들이 큰 손 고객을 위해 불법인 자전거래로 일반 투자자에게 피해를 입힌 것은 약자에게 세 부담을 전가한 인징(隣徵)이다. 저축은행의 장부조작은 헤위세금출납 보고서인 번작(反作)의 현대판이며, 최근 CD금리를 악용해 은행이 배를 불린 것은 세금을 고리로 뜯어낸 장리(長利)를 연상케 한다. 이쯤되면 금융기관이 아니라 탐욕기관이라 할 만하다.
얼핏 금융권만의 얘기인 것처럼만 보이지만 따지고 보면 정권 탓이 크다. 금융은 대표적인 규제산업이고, 이 때문에 어떤 산업보다 강력한 감시와 규제를 받는다. 금융권의 온갖 비리가 금융위원회, 금융감독원 감사와 공정거래위원회 조사에서 드러난 것도 그 반증이다.
실제 금융정책의 공과(功過)는 정권의 그것과 일치해왔다. 김영삼 대통령 시절 외환위기는 금융기관의 무차별적 외화차입과 기업대출에서 비롯됐다. 김대중 대통령 때는 신용카드 대란이 일어났고, 노무현 대통령 때는 부동산 투기바람으로 금융기관의 주택대출이 늘면서 가계부채가 급증했다. 이명박 대통령 들어서는 저축은행 사태로 대통령 측근들이 잇따라 철창행이다. 특히 경제대통령을 자부하는 MB지만 이전 세 정권에서의 금융관련 부조리는 거의 바로잡지 못했다. 4대 금융지주 회장이 모두 대통령의 최측근일 정도로 금융권에 ‘권력’을 휘둘렀지만, 드러난 금융기관의 행태를 보면 그 결과는 참담하다.
해외에서 차관을 얻어 산업화를 이룬 것도, 저축으로 중산층을 형성한 것에 금융이 역할을 컸다. 산업화로 어느 정도 자본을 축적한 21세기 대한민국 경제에서 금융의 역할은 이전보다 더 중요하다. 정치권의 화두인 ‘경제민주화’에도 자본의 효율적 재분배를 담당해야할 금융의 역할이 핵심이다. 미국이, 유럽의 선진국이 오늘날 경제위기를 겪는 것도 금융기관의 탐욕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 탓이 크다. 공자는 호랑이보다 무서운 게 가혹한 세금이라 했지만, 오늘날 가혹한 세금보다 무서운 건 금융기관의 탐욕이다.
홍길용 기자/kyhong@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