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 정태일 기자]IT기자들 사이에서 취재하기 힘들기로 둘 째 가라면 서러운 기업이 삼성전자와 애플이다. 중요 제품이 출시되기 직전까지 시기와 사양 등을 꼭꼭 숨기는 탓에 기자들과 양사 홍보팀은 항상 ‘술래잡기’를 한다. 판매량과 매출 등 수치에 대한 사항은 더욱 민감해 몇몇 시장조사기관에서 발표하는 추정치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이렇듯 베일에 겹겹이 가려진 삼성전자와 애플이 최근 노출에 과감(?)해지고 있다. 스스로 베일을 벗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벗기는 데 온 신경을 기울이는 탓에 기자는 물론 수많은 독자들이 그동안 감춰졌던 두 회사의 속살을 감상하는 기회를 얻고 있는 것이다.
이는 ‘세기의 소송’이라 불리는 삼성전자와 애플의 특허소송 덕분이다. 지난해 4월 애플이 삼성전자를 상대로 아이폰과 아이패드 디자인을 베꼈다는 특허침해를 주장하며 역사상 최대 특허전이 시작됐다. 현재 9개 나라에서 30여 건의 소송이 진행 중인 가운데, ‘하이라이트‘격인 미국 본안소송이 반환점을 지난 상태다.
중반을 넘겼지만 양측 모두 이렇다할 우세를 선점하지 못하고 그동안 감춰졌던 ‘속살’이 드러나며 모두 실리를 잃고 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애플은 디자인 침해 주장을 위해 신종균 삼성전자 사장 이메일까지 들추며 압박했다. 이메일에는 “예상치 못한 경쟁상대 애플을 만났다, 사용자 경험(UX) 측면에서 아이폰과 옴니아폰을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다” 등의 내용이 담겼다. 신 사장의 공식적인 멘트는 1년에 한두 번 나올까말까 한데 이 같은 개인적인 의견이 밝혀진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애플 역시 故 스티브 잡스가 삼성전자를 인정한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 증거 이메일에 따르면 잡스는 7인치 갤럭시탭을 산 한 블로거가 크기 때문에 아이패드를 팔았다는 얘기를 듣고 7인치 태블릿 제작 의견을 받아들였다.
이 정도는 약과다. 법원 명령에 의해 양측은 미국에서 지난 2년 동안 판매한 각 모델별로 판매량, 매출액을 고스란히 밝혔다. 기업이 절대 공개하지 않는 영업기밀이 공개된 셈이다.
그동안 두 기업의 경쟁은 혁신 제품으로 이어지며 소비자에게 즐거움을 선사했다. 하지만 자존심 싸움에서 시작된 소송전은 혁신과는 거리가 멀다. 서로 헐뜯기 경쟁에서 비롯된 노출전이 귀한 기회지만 그리 즐겁지만은 않은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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