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세로 급부상한 모바일 투표
차명폰 사용땐 1인 2,3표도 가능
보통·평등·비밀선거 위배 우려
원칙 눈감고 흥행에만 몰두해서야
디지털 기술의 발달로 경제와 생활 문화뿐만 아니라 민주주의 구현 방식과 정치 행태도 달라지고 있다. 정치인들은 휴대폰만 있으면 과거 선거유세장에서나 접했던 지름 45㎝짜리 확성기를 늘 차고 다니는 것이나 다름없다.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 익숙한 시민들은 활발하게 정보를 공유하면서 문자 몇 어절로 빗나간 정치 행태를 도편추방(陶片追放)할 수 있다. 조선시대 세종이 한글을 창제할 때 사대부들이 지식의 확산을 ‘역병(疫病)’이라 걱정했던 것처럼 이제 웬만한 정치 꼼수는 필부필부에게도 여지없이 간파당한다.
모바일 등 디지털 기술이 급기야 피와 감동의 민주주의 역사를 고스란히 안고 있는 선거에까지 활용되고 있다. 특히 모바일 투표는 올 들어 대유행이다. 2007년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 경선 때 처음 도입됐지만 그 비중은 12.5%에 불과했다. 그러나 올 1월 민주당 대표 경선, 2~3월 총선 전 민주당 당내 경선, 8~9월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결정적인 위력을 발휘하며 대세로 떠올랐다.
문제는 1인이 1표만 행사하는 평등선거, 유권자가 손수 투표를 하는 직접선거, 외압 없이 자유롭게 의사 표시를 하는 비밀선거의 원칙을 담보할 장치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 부정 시비가 끊이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선관위는 직접, 비밀투표 등 민주적 선거 원칙을 준수했는지 확인할 수 없다는 이유로 모바일 투표가 포함된 경선 관리를 위탁받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여당은 고민 끝에 모바일 투표를 포기했다. 몇몇 지역에서 대의원 투표에 지고도 6연승을 질주한 문재인 후보에 이어 2위를 기록 중인 손학규 후보는 3일 “정체 모를 무더기 모바일 세력의 작전 속에 민심과 당심은 처절하게 짓밟히고 있다”고 비난한 뒤 “이 작전으로부터 민주주의를 구출해 달라”고 호소했다. 김두관ㆍ정세균 후보도 당이 문 후보에게 유리한 룰을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디지털 민주주의 제도’를 주장하는 쪽에서는 본인 인증을 보다 철저히 하고 ▷투표 시 혼자 있는지 ▷자유로운 선택인지 ▷평소 쓰는 유일한 휴대폰인지 ▷타인 명의로 된 제2의 휴대폰은 없는지 ▷공정선거 원칙을 어길 경우 책임을 질 것인지 등의 항목에 대해 ‘체크’ 형태로 다짐을 받은 다음 사후 검증을 하면 투표 실행 단계에서의 반칙 가능성이 거의 없을 것이라는 견해를 내놓는다.
과연 그럴까. 모바일 투표 체제에서 비밀선거 원칙은 선거관리요원이 투표 시점 투표자의 동선을 추적 감시하지 않는 한 담보할 수 없다. 휴대폰을 쓰지 않는 가족 명의의 폰과 자기 업무용 폰 2대 이상을 사용한다면 1인 2, 3표가 가능하므로 평등선거도 불가능하다. 직접선거 원칙을 견지한답시고 화상 확인을 했다가는 비밀선거 원칙에 흠집이 난다. 차명폰이 존재하는 한 완벽한 직접선거는 애초부터 무리다. 주민등록, 연령 등 성인 국민으로서 기본 요건만 갖추면 누구에게나 ‘그냥’ 투표권이 주어지는 보통선거의 원칙 역시 ‘신청한 자’에게만 권리가 간다는 점에서 제한적으로 지켜지는 수준이다. 신청자에게만 권리가 주어지니 모바일 선거인단은 지역별 인구 비례와 크게 어긋나고, 과연 경선 결과가 민심을 반영할지 의문스럽다는 지적까지 나온다.
‘선거 민주주의’라는 나무에 단 하나의 인자라도 부족하면 병이 난다는 점은 피와 눈물로 점철된 수천년 민주정치의 역사가 잘 말해준다. 어떻게 이뤄낸 4원칙인가.
민주당은 민심의 큰 흐름을 확인하는 것으로 족하다고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수권정당을 지향하는 공당이 방법상의 원칙을 간과해서야 되겠는가. 일부 국민은 “중ㆍ고생도 알 만한 선거 원칙을 똑똑한 사람들이 외면한 채 휴대폰에 매달리는 건 포퓰리즘이고, ‘흥행’에만 몰두한 결과”라고 모바일 투표제 도입의 속내를 간파한다. 민주적 선거 4원칙을 교과서에서 빼지 못한다면 모바일 투표는 공적으로 쓸 툴은 아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