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정부가 창조경제 기치를 내걸고 의욕적으로 신설했던 유력 부처의 장관 내정자가 돌연 사퇴했다. 표면적으로는 정부조직 개편이 정쟁으로 지연되고 있는데 따른 항의 성격이 짙다. 이면에는 한 때 미국인으로서 기관에서 일했던 이력, 미국내 행적이나 사생활까지 검증 돋보기를 들이대는데 대한 감정적 대응 행태도 엿보인다.
국정을 이끌 장관으로서 자질 검증은 중요하지만 관용도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특별한 고의성이 없는 한 실수는 결정적인 결격사유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살면서 여러가지 실수를 하기 마련이다.
이런 실수나 실패를 용서할줄 아는 태도. 선진사회와 우리가 다른 점은 분명 이것이다.
아이들은 언제나 넘어지면서 크는 법이다. 넘어지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면 아이는 걸음마를 시도하지 않을 것이다. 걸음걸이도 결코 배울 수 없다.
세계적인 정치지도자, 경영인, 예술인 등 한 분야에서 업적을 이룬 이들은 하나같이 실패를 딛고 일어선 이들이다. 실패가 없었다면 그들은 존재할 수 없었다는 연역논리는 그래서 성립된다.
우리 사회는 성공에 대한 장려만 있지 실패에 대해선 가혹하다. 실패를 무덤으로 본 탓이다.
따라서 실패에 대한 정당한 평가는 물론 재기기반 자체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가난한 시절 적은 자원을 집약적으로, 빠르게 활용하려다 보니 실패를 금기시하는 문화가 너무나 굳게 형성됐다. 효율과 성과주의에 집착한 나머지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없는 숨막히는 사회가 된 것이다.
하지만 실패는 학습이며, 이 학습은 더 큰 성장을 가져다 준다는 측면에서 장려될만 하다. 우리나라를 세계 선도국가로 만들 사회적 자산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여기엔 실수나 실패에서 제대로 배워야 한다는 전제가 항상 깔려 있다.
실패가 장려돼야 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창의와 혁신이 이를 기반으로 생겨나기 때문이다. 실패를 용서하지 않을 경우 아무도 미지의 영역을 탐색하고, 신기술에 도전하거나 창업에 뛰어드는 등의 위험을 감수하려고 하지 않게 된다. 그리하여 위험회피형, 무사안일형 인간들로 넘쳐나는 ‘끔찍한’ 사회가 되는 것이다.
최근 수 년 새 실패 기업인에 대한 재기 지원제도 같은 것이 조금씩 생겨났다. 그렇지만 아직 의미 있는 성과를 냈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완고한 불관용의 문화 탓에 장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측면이 크다 할 것이다.
우리 경제는 이미 청년기를 지나 장년기 고개마저 넘고 있다. 체력 저하 조짐은 이미 요 몇해 사이의 경제성장률로도 증명됐다. 새로운 형태의 창조적 경제 생태계를 만들어내지 않으면 저성장 구조가 고착되고 현상유지도 힘들어질 것은 자명하다.
보다 담대해지고 관용하려는 사회적 노력과 합의가 필요하다. 기존의 완고한 틀을 고수하려다간 게도 구럭도 다 잃는 길밖에는 달리 없다.
부디 시각을 바꿔 실패를 수련의 일부로, 실수를 성장의 자양분으로 받아들이자. 실패한 자들, 그리하여 뼈저리게 깨달은 자들을 사회 곳곳으로 돌아오게 하자. 우리 사회는 엄청난 성장동력을 가동도 않은 채 방치하고 있다.
강호(江湖)는 생각보다 훨씬 넓다. 세상엔 지난 실패를 거울삼아 자신을 벼리고 또 벼리며 도광(韜光)한 채 양회(養晦)하고 있는 자들 얼마나 많은가.
<조문술 산업부 차장/freiheit@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