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과거사 망발이 말 돌리기 장난으로 이어지고 있다. 아베 총리는 8일 참의원에 출석, “우리나라(일본)는 한때 많은 국가, 특히 아시아 제국의 국민들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안겼다. 그런 인식은 갖고 있다”고 했다. 전날 정부 대변인인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이 “고노 담화 수정을 검토한 적 없다”고 한 데 대한 보충성 언급이다. 가시다 후미오 외상도 같은 말을 내놓았다.
레코드판을 틀어 놓은 것처럼 일본 최고지도자들이 한목소리로 과거사 반성 발언을 쏟아낸 모양새다. 얼핏 보아 마치 과거 침략전쟁으로 인한 막대한 피해에 대해 무거운 죄책감을 피력하는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앞뒤 정황을 조금만 꿰맞추면 같은 말을 놓고 같은 입으로 얄팍하게 말을 돌리는 수사적 술수에 지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진정성을 손톱만큼도 찾기 어렵다는 것이 문제다. 아베 총리는 같은 날 같은 자리에서 “(1974년) 유엔총회에서 ‘침략’의 정의에 대해 결의했지만 그건 안보리가 침략행위를 결정하기 위해 참고로 삼기 위한 것”이라며 “침략의 정의는 이른 바 학문적인 필드에서 다양한 논의가 있으며 결정된 바 없다”고 말했다. 일본 정부까지 군말 않고 찬성했던 유엔총회 결의마저 ‘참고사항’으로 깎아내린 현직 일본 총리다. 과거 단명 총리시절 신사 참배를 이행하지 못한 것을 두고 지난해 ‘통한’이란 표현을 써가며 재기에 성공한 아베다운 면모가 아닐 수 없다.
불과 보름여 전 아베 총리는 식민지 지배와 침략을 사죄한 1995년 ‘무라야마 담화’와 관련, “침략의 정의는 국제적으로도 정해지지 않았다. 국가 간의 관계에서 어느 쪽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르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당사국인 한국과 중국은 물론 미국까지 불쾌한 반응을 보였고, 급기야 미국을 방문 중인 박근혜 대통령은 엊그제 “일본은 거울을 보고 책임 있는 역사의식을 가져야 할 때”라며 우경화 움직임을 강하게 비판하기에 이르렀다. 아베 총리가 한 발 물러날 정황이긴 하다.
아베 총리의 갈지(之)자 행보가 더 불쾌한 것은 일련의 과거사 발언에서 식민이나 침략이라는 말을 교묘하게 쏙 빼놓고 있다는 사실이다. 최근 영국이 과거 식민지 국가였던 케냐의 피해자들에게 국가 차원의 배상에 나섰고, 독일은 30년 이상 통치자들이 대물림으로 과거사를 통렬하게 반성해 오고 있다. 일본만 역사 앞에 나홀로 역주행인 것이다. 모름지기 일국의 지도자는 국격을 상징하고 대변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