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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데스크 칼럼 - 정덕상> 버진아일랜드로 달려간 재벌들

복지재원 마련을 위해 ‘지하경제와 전쟁’을 벌이고 있는 박근혜정부로서는 기다리는 바였다. 계좌 개설 경위, 자금의 형성과정 등에 대한 고강도 조사는 당연하고 탈세 혐의가 밝혀지면 추징하고 검찰 수사 의뢰도 당연한 순서다.



1883년 출간된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소설 ‘보물섬’. 인간의 모험과 욕망의 배경인 ‘상상 속의 섬’ 중에는 카리브해 외딴 곳에 위치한 ‘버진아일랜드’도 있다고 한다. 보물섬이 출간된 지 130년, 버진아일랜드는 두고두고 파헤칠 현실 속의 ‘보물섬’으로 다가온 듯하다. 동굴 속에 숨겨진 금은보화가 달러지폐와 은행금고로 바뀌었을 뿐이다.

독립 인터넷 언론 ‘뉴스타파’와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가 지난 22일 영국령 버진아일랜드 등 조세피난처에 유령법인을 설립한 한국인은 모두 245명이라고 밝혔다. 파장이 만만찮다. 이수영 OCI 회장 부부, 조중건 전 대한항공 부회장의 부인 이영학 씨, 조욱래 DSDL 회장과 장남 현강 씨 등 실명까지 거론했다. 확인작업을 거친 뒤 차례로 대기업의 임원을 포함한 정·재계 인사의 명단을 공개하겠다고 했다.

이미 대중문화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재계 서열 14위 CJ그룹도 해외에 특수목적법인을 설립, 본사 및 계열사와 정상적인 거래를 하는 것처럼 위장하는 수법으로 탈세를 하고 거액의 비자금을 조성한 의혹으로 검찰의 융단폭격식 수사를 받고 있다. ICIJ의 폭로를 허투루 흘리기는 어렵게 됐다. 유난히 덥다는 올 여름, 블록버스터 ‘캐리비언의 해적’보다 흥미진진한 납량특집극의 예고편이 나온 것이다.

물론 페이퍼컴퍼니 설립 자체만으로는 불법이 아니다. 그렇지만 과거 사례를 보면 세금 회피, 불법 자금 은닉의 목적으로 조세피난처를 애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2000년 관세청은 840여개의 국내 기업이 조세피난처에서 8310억원가량의 불법 외환거래를 한 사례를 적발하기도 했다. 상당액은 외국인 자금으로 둔갑하거나, 돈세탁을 거쳐 비자금으로 흘러들어왔다. 조세피난처의 유령법인은 돈과 권력과 특혜의 중심이었다.

작년에는 영국의 조세정의네트워크로부터 1970년대부터 2010년까지 한국에서 조세피난처로 이전된 자산이 7790억달러(약 870조원)에 달한다는 믿기지 않는 주장까지 나왔다. 사실이라면 나라를 거덜내고도 남을 만큼의 어머어마한 국부유출이다. 1997년 전국민을 고통속에 몰아넣은 외환위기의 원인이라는 해석도 있다. 특히 재벌가가 조세천국에 돈을 맡겼다면 횡령·배임, 분식회계까지 의심된다.

복지재원 마련을 위해 ‘지하경제와 전쟁’을 벌이고 있는 박근혜정부로서는 기다리는 바였다. 부유층의 모럴해저드를 단죄하고, 조세정의를 바로세우고, 탈루액까지 추징해 국고를 채울 수도 있다. 계좌 개설 경위, 자금의 형성 과정과 성격 등에 대한 고강도 조사는 당연하고 탈세 혐의가 밝혀지면 추징하고 검찰 수사 의뢰도 당연한 순서다. 마침 미국과 유럽 등 전 세계가 글로벌 역외탈세를 막기 위한 국제공조를 한창 논의하고 있다. 검은 돈을 빼돌릴 수 없도록 감시망을 촘촘히 짤 수 있는 더없이 좋은 환경이다.

다만 옥석은 구분되어야 한다. 재벌총수의 이름이 줄줄이 거론되면서 반기업정서도 덩달아 증폭되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국세청과 검찰의 칼날은 신속하고 정확하고 예리해야 한다. 경제 전반이 위축되지 않도록 썩은 부분을 깔끔히 도려내는 외과수술 같은 조치는 국가기관의 몫이다.
 

jpurn@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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