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中 눈치보며 대화 시늉
회담 무산, 한국에 덤터기
남북 서로 입장·직제 이해 노력
회담 무산을 연기로 이어가야
이번엔 남북 회담이 성사되는 줄 알았다. 그것도 너무나 오랜만에 성사되는 회담이어서 많은 이는 이번 회담에 기대를 걸었었다. 그런데 결국은 무산됐다. 소위 말하는 ‘격’이 안 맞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중요한 회담을 무산시킨 ‘격’이란 과연 무엇일까?
‘격’은 우리 사회생활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사장과 과장은 무게부터 다르게 마련이다. 그런데 만일 어떤 회사가 있는데 그 회사의 직책이 여타 다른 회사의 직책과 다르다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
예를 들어, 어떤 회사는 과장급이 거의 회장 수준의 자율권을 행사하는데 다른 회사는 그냥 과장이 과장 역할만을 수행한다고 할 때 그 ‘격’을 생각하면 과장끼리 만나야 하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회장과 과장이 만나는 꼴이 된다.
또 다른 예를 들어 보자. 남북 정상회담을 한다고 가정했을 때 대한민국의 정상은 분명히 박근혜 대통령이 맞지만, 북한의 경우는 ‘격’을 따져야 하는지, 아니면 ‘실질적 역할’을 따져야 하는지 헷갈린다. 만일 ‘격’만을 따진다면 남북 정상회담에서 북측의 카운터파트는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맞다. 그는 북한의 헌법상 국가원수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일 남북 정상회담에서 김영남이 등장한다면 남측은 당장 회담을 그만둘 것이다. 왜냐하면 ‘격’은 맞을지 몰라도 ‘실질적 역할’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번은 정반대의 일이 벌어진 것 같다. 우리가 먼저 이른바 ‘격’을 따졌다. 우리 측은 애초에 류길재 통일부 장관을 회담 대표로 내세우려 했지만, 북한이 김양건 통일전선부장이 나오지 않는다고 하는 바람에 차관으로 대표의 위상을 격하시켰다. 반대로 북한은 강지영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서기국 국장을 수석대표로 해서 전종수 조평통 부국장과 김성혜 조평통 부장, 박철수 중앙특구개발지도총국 부총국장을 대표단에, 원동연 통일전선부 부부장을 보장성원에 포함시켰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우리 측은 김양건을 장관급으로 보는 반면 북한은 그를 장관급 이상의 직책으로 취급하고 있고, 또한 강지영 국장의 경우 우리의 입장에서 국장급으로 취급할지 몰라도 북한은 그렇지 않다는 점이 무산의 이유가 됐다. 중요한 점은, 북한은 독재 체제여서 아무리 미미한 보직자라도 독재자가 힘을 주면 그만인 것이라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북한의 경우 직책 이름이 중요하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눈여겨봐야 할 대목은 대화 무산을 계기로 오히려 북한에 힘이 실리는 꼴이 됐다는 것이다. 북한이 이번 대화에 이렇게 선선히 나온 이유는 박근혜정부의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대북 정책에서 기인한 부분도 있지만, 중국이 북한에 냉랭한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다. 기댈 곳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중국 측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6자회담 얘기도 하고, 우리 측의 대화 제의에 적극 화답하려고 했다. 미ㆍ중 정상회담에서도 북한이 핵보유국임을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공동으로 천명했는데, 이는 북한이 주장하는 핵과 경제의 병진 노선을 수정하라는 중국 측의 간접적 의사 전달이라고 볼 수 있다. 결국, 북한이 이렇게 나온 데에는 우리 정부의 단호한 입장뿐만이 아니라 북ㆍ중 관계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말이다.
남북관계가 ‘격’을 따지다 무산됨에 따라 북한은 중국에 할 말이 생겼다. 자신들은 할 만큼 했는데 대한민국이 이런 제안을 걷어차 버리는 바람에 대화를 할 수 없게 됐다고 말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면 걱정되는 부분은, 북한이 도발의 명분을 획득했다고 할 수 있는 점이다.
그렇기에 이제라도 남과 북은 조금씩 상대 측의 입장과 직제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지금의 무산을 회담의 연기로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지금 회담이 무산되면 회담 얘기를 꺼내지 않음보다 못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