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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제광장 - 문창진> 대한민국 금연정책 성적표
경고그림커녕 판촉활동 제한없고
국민 건강 해치는 나쁜 가격
성인남성흡연율 OECD 1위 오명
국회·정부 책임 통감해야



지난 5월 31일 세계보건기구(WHO)가 정한 ‘금연의 날’ 기념식이 성대하게 열렸다. 보건복지부 장관, 국회 보건복지위원장 등 내외 귀빈들이 참석해 자리를 빛냈고, 영화배우 이범수를 금연홍보대사로 위촉했다. 그렇다면, 한국의 금연 정책은 기념식 행사만큼 성공적이었을까.

1995년 국민건강증진법을 제정하면서 금연구역을 설정하고 담배에 건강증진부담금도 부과하는 등 금연 정책이 순항을 하는가 싶었다. 그러나 대한민국 금연열차는 멀리 달리지 못했고 지금은 거의 정지 상태다. 지난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자료에 의하면 한국의 성인 남성 흡연율은 회원국 중 가장 높다. 반면 담배 가격은 가장 낮다. 최근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 따르면 가격 정책, 금연장소, 광고 규제 등에서 한국의 금연 정책 수준은 OECD 국가 중 최하위로 나타났다. 이러한 자료들을 살펴보면 금연 정책이 허술할수록 흡연율이 높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필자는 WHO 담배규제기본협약 총회의장으로서 올해 스물여섯 번째 세계 금연의 날을 맞아 한국의 금연 정책을 냉철하게 평가해보려고 한다.

첫째, WHO가 강력하게 권고하는 담배 가격 정책은 완전 낙제점이다. 한국의 담배 가격은 현재 2500원 수준으로, 2004년 한 차례 인상된 이후 동결된 상태다. 서민의 호주머니 사정만을 생각하면 아주 착한 가격이다. 그러나 흡연으로 망가지고 있는 국민 건강을 생각하면 아주 나쁜 가격이다. 담배 가격 정책에 대한 전망은 대체로 회의적이다. 이번 정부에서도 담뱃값 인상은 물 건너갔다는 시각까지 나오고 있다.

둘째, 담뱃갑 경고 그림 규제 역시 낙제점이다. WHO는 담뱃갑에 흡연의 신체적 피해를 경고하는 그림을 앞ㆍ뒤ㆍ옆면 면적의 50% 이상 넣도록 권고하고 있다. 호주는 최근 민담배갑(plain packaging) 정책을 채택했고, 태국의 경우 경고 그림 면적을 85%로 확대해 전 세계에서 가장 큰 경고 그림을 삽입할 예정이다. 이러한 경고 그림의 취지는 담배 디자인을 최대한 혐오스럽게 만들어 흡연 욕구를 억제하려는 것이다. 실제로도 담뱃갑 경고 그림은 흡연율을 2~3%포인트 낮추는 효과가 있는 것으로 입증됐다. 국제적 추세가 이러함에도, 한국 담배는 흡연 욕구를 오히려 부추기게끔 디자인이 날이 갈수록 아름다워지고 있다.

셋째, 금연구역 정책은 그나마 괜찮은 편이다. 금연구역 지정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체계적인 단속과 정착화 작업이 과제로 남아 있긴 하지만 국회, 관공서, 역, 터미널, 커피숍, 호프집, 대형 식당 등 여러 사람이 함께 이용하는 공간을 금연구역으로 지정했고, 일부 지자체는 자체적으로 조례를 제정해 길거리 흡연까지도 규제하고 있다. 이에 더해, 청소년의 출입이 잦은 PC방도 6월부터 금연구역에 포함된다.

넷째, 담배회사의 광고ㆍ판촉ㆍ후원활동에 대한 규제는 매우 관대하다. WHO는 광고ㆍ판촉ㆍ후원행위를 포괄적으로 금지할 것을 회원국들에 권고하고 있지만, 한국은 잡지 광고가 아직도 가능하고 판촉장소도 제한이 없다. 시민단체 관계자들에 따르면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한 담배회사의 판촉활동이 매우 은밀하고 지능적이어서 잘 드러나지 않는다고 한다. 광고와 판촉을 통해 청소년들을 흡연자로 만드는 행위는 국민 건강권을 위협하는 심각한 범죄가 아닐 수 없다.

한국의 성인 남성 흡연율이 후진국 수준에 머물고 있는 책임은 흡연자에게 있지 않다. 그 책임은 금연 정책을 입안하고 실행하는 국회와 정부가 져야 한다.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적당히 금연 정책을 끌고 갔다가는 국제사회에서의 망신은 물론, 국민으로부터 엄중한 비판과 질책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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