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딛고 일어선 한강의 기적
해외 도움 없었다면 불가능
阿 여전히 전쟁·기아 고통
상부상조 정신으로 도와줘야
광화문 프레스센터 앞을 지나다 길가에 전시된 빛바랜 사진들을 보았다. 1950년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우리 강산과 피난행렬, 굶주려 커다란 눈만 보이는 어린아이들의 모습이 내 눈에 클로즈업돼 크게 보였다. 아프가니스탄과 같이 전쟁이 끝난 나라들의 모습과 비슷하거나 더 비참해 보이기도 했다. ‘아! 지금 풍요 속에 가려져 있었구나. 우리의 옛 모습이….’ 나는 중얼거리며 그 사진들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나는 6ㆍ25전쟁이 끝난 뒤 5년 후인 1958년에 태어났지만 껌과 과자를 얻기 위해 미군들을 쫓아다녔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리고 내가 태어난 뒤 30년 후 우리는 88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해 세계를 놀라게 했다.
한국인들은 정말 열심히 일해 한강의 기적을 만들었다. 그렇게 되기까지 한국은 세계의 많은 나라로부터 엄청난 도움을 받았다. 밀가루로부터 옷, 학교 짓는 벽돌까지, 해방된 1945년부터 1999년까지 총 128억달러의 ODA(공적 개발 원조)를 받았다. 이 수혜 총액은 2005년 불변가치로 460억달러에 이른다.(삼성경제연구소) 세계 15위 수준의 경제국으로 성장한 한국은 어려운 나라들을 얼마나 도와주고 있는가. 1995년 1억달러였던 ODA 지원 사업이 2011년 13억달러로 늘어났지만, 이는 최근의 일이다. 한국이 공적 개발 원조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외환위기 이후 10년간 지원액이 40억달러로 전 세계 ODA 기여도의 0.7% 정도뿐이다.
GNI 대비 공적 개발 원조 규모도 2010년 이후 0.12%로, OECD DAC(개발원조위원회) 회원국의 3분의 1 수준이다. 우리가 인색하다고 비난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내용적으로도 아프리카 등 최빈국 지원이 적고, 유상 지원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다는 지적도 받고 있다. 정부도 이러한 문제점을 잘 알고 있어 개선을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한계가 있기 때문에 국민의 더욱 많은 관심과 지원 확대가 필요하다.
아프리카의 많은 나라, 전쟁이 끝난 나라로부터 도움을 청하는 많은 절규가 들려온다. “목구멍으로 도저히 넘길 수 없는 물을 동물과 사람이 함께 마시고 있습니다. 어린 꼬마가 자기 몸무게만 한 20ℓ 물통을 머리에 이고 발로 굴리면서 벌겋게 달궈진 흙길을 낑낑대며 걸어갑니다.”(한지혜ㆍ아프리카 맑은 물 지원 NGO 홍보대사)
“깜깜한 방 안에 죽은 듯 누워 있는 갓난아기, 팔은 말라 비틀어져 있고 다리는 꼬챙이보다 더 가늘다. 나오지 않는 젖을 물려보는 엄마, 두 살이 넘도록 걷지 못하는 꼬마, 집 앞에 누워 초점 잃은 눈빛으로 죽음을 기다리는 할아버지, 가재도구를 다 팔았는지 방 안에는 옷 몇 개와 빈 냄비만 덩그렇다.”(한비야ㆍ여행전문가)
우리는 세계의 도움으로 지금 풍요를 누리고 있다. 경제가 어려워도, 이 순간 많은 사람이 비만을 걱정하고 아이들은 안 먹거나 너무 많이 먹어 걱정하는 나라가 됐다.
많은 도움을 바라는 게 아니다. 1만원이든, 2만원이든 할 수 있는 작은 도움을 학수고대하고 있다. 한 끼 외식비를 줄여도 되고, 술값을 조금 줄여도 된다. 자식들에게 전부 물려주지 말고 아주 작은 일부를 나눠도 된다. 이렇게 하는 것이 한 생명을 살린다. 우리가 예전에 살아났듯이. 지난주 교회에서 해마다 하는 의료 봉사를 다녀왔다. 도움을 받은 캄보디아 어린아이들의 맑은 눈, “어꾼(감사합니다)”하며 합장하는 그들을 잊을 수가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상에는 4초마다 한 명의 아이가 전쟁과 기아로 죽어가고 있고, 매일 3만5000명의 아이가 먹을 것이 없어 죽거나 전쟁터의 총알받이가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2억5000만명의 아이들이 고된 노동에 시달리고 있습니다.”(김혜자ㆍ탤런트)
어려울 때 남을 돕는 상부상조 정신이 우리를 지켜왔다. 지금 우리의 경제가 어렵다. 이럴 때 남을 돕는다면 의미가 더욱 크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