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ㆍ25 한국전쟁의 총성이 멈춘 지 올해로 꼭 60주년. 생사불명의 국군포로들이 남긴 애끓는 사연들이 눈시울을 붉힌다. 박선영 동국대 교수(전 선진당 의원)에 의해 뒤늦게 공개된 41통에 이르는 국군포로들의 편지에는 조국에 대한 사랑, 혈육에 대한 그리움, 분단으로 인한 생이별의 가슴앓이가 구구절절 녹아져 내린다. 오늘을 살아가는 후손으로서 차마 소리 내 읽을 수조차 없을 정도로 가슴이 먹먹해지고 얼굴이 화끈거린다.
6ㆍ25 전쟁이 터진 1950년 바로 그해, 24세 청년이던 권모 씨는 울면서 배웅하는 어머니와 형제를 뒤로 한 채 총을 들고 전선을 향했다. 잠시 집을 비운 아버지와는 작별인사 겨를도 없었다. 전선을 누비다 포로가 된 권 씨는 77세가 되던 해 노구를 지팡이에 의지하며 두만강을 넘어 중국 모처에 은신하면서 남쪽 가족과의 상봉을 애타게 기다리다 편지를 썼다. 남쪽 동생들을 만나기 전에는 절대로 돌아갈 수 없으며, 숨이 지는 한이 있어도 꼭 오길 손꼽아 기다리겠노라고.
결론부터 말하면 이 사연을 남긴 권 씨는 지금 생사불명 상태다. 살아있다면 87세지만 북쪽 가족에게 남긴, “뜻이 이뤄지지 않게 되면 남반부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밝은 산에 묻어 달라”는 애통한 사연대로 영면의 꿈이 이뤄지기란 거의 불가능한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이처럼 조국을 위해 한 몸 기꺼이 초개같이 버리다 포로 신세가 돼 갖은 고초를 겪어 온 이들에 대해 너무 소홀했다.
1953년 7월 정전 이후 돌아오지 못한 국군과 유엔군 포로는 줄잡아 10만여명인 것으로 추산된다. 한평생 세월이 흐른 지금 여전히 북녘 땅에는 권 씨처럼 쓸쓸히 생을 마감해 가는 국군포로가 500명이 넘는다고 한다. 사지를 헤매다 잡혀 수십년 동안 오지 탄광에서 석탄을 캐왔지만 국군포로라는 딱지로 갖은 수모를 겪은 이들이 수백명이라는 얘기다. 무엇보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게 문제다.
지금 이 시간에도 북한 곳곳을 누비며 한국전쟁 때 실종된 자국 군인들의 유해를 발굴해 성조기로 정성껏 싸서 본국으로 옮기고 있는 미국보다 정작 우리가 더 나서야 했었다. 탯줄 묻힌 고향을 지키다 포로가 된 것이 죄가 되었다면 한 편의 글이라도 보내달라며 우리 정부를 원망한 어느 통신병 출신 포로의 물음에 늦었지만 이제라도 답하는 것이 최소한의 도리다. “국군포로 문제를 군사비밀로 분류해 군사비밀통제처에서 주관하는 것부터 말이 안 된다”는 박 교수의 지적을 귀담아 들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