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에 의해 강제 징용됐던 피해자들에게 일본 기업이 배상을 해야 한다는 반가운 판결이 처음 나왔다. 서울고법 민사19부는 10일 90세 고령인 강제징용 피해자 여운택 씨 등 4명이 당시 구 일본제철을 이어받은 신일본제철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파기환송심에서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침략전쟁을 위해 인력을 동원한 것을 ‘반 인도적 불법’으로 규정하고 신일본제철이 이들에게 1억원을 지급하라는 게 재판부 판단이다. 일부 피해자가 우리 법원에 소송을 낸 지 8년 만에 일본 기업의 배상 책임을 끌어냈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의미있는 판결이라 하겠다.
이번 판결로 일제강점기에 징용에 끌려가 모진 고초를 겪은 피해자들의 줄소송이 이어질 전망이며 승소할 가능성도 높다. 그러나 실제 배상까지는 그 과정이 쉽지 않아 보인다. 우선 신일본제철 등 피고 일본 기업들이 대법원에 상고하면 법률 다툼을 계속해야 한다. 설령 대법원에서 확정판결을 받더라도 이들이 쉽게 배상금을 내줄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 원고들이 일본 법원에 우리 확정 판결 내용을 승인해 달라는 요청을 해야 하는데 이를 들어줄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이번 소송이 시작되기 전인 2003년 우리의 대법원격인 일본 최고재판소가 일부 징용피해자가 낸 소송에서 손해배상을 할 필요가 없다고 한 판결이 걸림돌이다.
그렇다면 공은 정부로 넘어갈 수밖에 없다. 사안의 특성상 이 문제는 사법부가 법률에 근거해 풀어가는 데는 한계가 있으며 정부 차원에서 대응하는 것이 맞다. 물론 외교적으로 워낙 민감한 사안이어서 정부로선 조심스러운 점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국민정서와 역사적 상징성을 생각해서라도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야 한다. ‘정부가 일본정부와 위안부 문제를 협상하지 않는 것은 위헌’이라고 헌법재판소의 판단도 있지 않은가. 국무총리실과 외교부 등 관련 부처 합동으로 종합적인 대책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일본 법원과 정부는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에 따라 개인의 청구권도 소멸했다는 주장을 근거로 일제강점기 개인 피해보상을 거부하고 있다. 올해 초 영국 정부는 자국의 식민지였던 케냐에서 1950년 발생한 독립 봉기 진압과정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게 개인별 보상을 하기로 결정했다. 과거를 반성하는 것은 진정한 용기이고 깨어 있는 역사 인식이다. 무엇보다 일본 정부와 기업이 이번 판결을 수용하는 문명적 판단을 과감히 내려주기 바란다. 한ㆍ일 양국이 언제까지 과거 역사에 얽매여 미래의 발목을 잡을 수는 없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