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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함영훈> 반바지는 귀태(貴態) 안난다고? 장관부터 입어라.
[함영훈 미래사업본부장] 무수한 일들이 난무하는 올 여름의 한 켠엔 반바지 얘기도 있다. 원자력발전소 부품 결함 비리 사건 때문에 몇몇 발전소의 가동이 중단되고 에너지난이 가중되면서 나온 ‘반바지 정책’과 그를 둘러싼 트렌드를 말한다. 반팔 티셔츠와 반바지 복장으로 근무하면 체온을 2℃ 정도 낮추는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한국전력은 지난 8일부터 에너지 절감문화 확산을 선도하고 개방적이며 유연한 조직문화 구현을 위해 반바지와 샌들착용을 허용하는 ‘수퍼 쿨비즈(Super Cool Biz)’를 시행한다고 밝혔다. 안양시는 10일 매주 수요일 반바지 복장 출근을 허용하는 등 에너지절약 지침을 마련했다. 충청북도는 이달부터 야간 근무자, 청소 용역, 휴일·현장 근무자, 재난상황실 등 24시간 근무자에게 반바지를 입고 업무에 임해도 된다고 했다.

반바지가 올 여름의 화두가 되자 ‘5부바지’, ‘냉장고 반바지’, ‘장마용 반바지’ 등이 인기를 끌고, 20년전 유행했던 ‘치마 반바지’가 다시 주목받는 등 시장도 반응을 한다.

하지만, 이들 공공기관 실제 평일 반바지 착용은 찾아보기 어렵다. 보도에 따르면, 한전의 한 지방 지사에선 정책 시행이후 단 한명도 반바지를 입지 않았다고 한다. 직원들이 서로 눈치만 본다는 것이다. 수자원공사의 한 지사에서도 반바지 착용이 허용됐지만, 아직은 없다고 한다.


2008년 대구 서구청이 먼저 반바지 착용을 시도했다. 하지만 실행되지 않아 꼬리를 감추었단다. 서울시도 지난해 시행했는데, 반바지를 착용한 시장 주재 회의때 나이 지긋한 구청 간부들이 부랴부랴 반바지 입고 구두 신은 채 회의장에 들어섰다가 너나할 것 없이 폭소를 터뜨린 적도 있었다. 결국 서울시의 반바지 정책도 관성을 얻지는 못했다.

그래서인지 올해 나온 반바지 정책에는 단서들이 붙었다. 한전은 ‘무릎위 5㎝이하의 반바지’를 명시하면서 “품위 유지는 되어야 한다”고 했다. 충북도는 “기강이 흐트러지지 않는 범위에서만 허용된다”고 밝혔다. 안양시는 수요일 이외의 다른 요일은 불허했다.

대검찰청 출입기자시절이던 1998년 어느 휴일 느닷없이 공안부장의 브리핑이 있었다. 집에서 쉬다 부랴부랴 소식을 들은 한 기자가 반바지 차림으로 대검 공안부장 간담회 장소에 등장하자 폭소와 함께 비아냥이 쏟아진 적이 있었다. 가수 노유민은 장모 회갑잔치에 반바지 차림으로 갔다가 뒤늦게 장모에게 “잘못됐다”고 용서를 빌기도 했다.

더워서 반바지 입겠다는데, 왜 그럴까. 긴옷 정장에 길들여진 현재 세태, 반바지에 대한 지금 우리의 선입견, 모두가 문화이다. 정장에 익숙한 민원인들이 반바지 입고 근무하는 대민 직원들의 모습을 어색해 할 것은 불 보듯 선하다. 직장내 불필요한 설왕설래도 오갈 것이다. 다리털 논쟁도 붙을테고, 반바지에 구두를 신을지, 샌달을 신을지, 운동화를 신을지 논란도 있을 것이다. 윗옷을 뭘로 입어야 ‘품위’를 유지할 수 있을지도 관심거리이다. 분명 ‘귀태(貴態:귀티)가 안난다’는 얘기도 나올 것이다. 일 얘기 하다가 반바지 얘기 하느라 시간을 허비할수도 있겠다.

이미 일상에 젖어있는 문화를 갑자기 바꾸는 일은 위로부터 해야 한다. 에너지를 담당하는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차관, 국장들이 먼저 입고, 한국전력, 수자원공사 사장, 부사장, 구청장 등이 먼저 입어야 한다. 그리고 기존 문화가 이미 ‘반바지는 귀태 안난다’는 것인데, 거기에 “구두를 신어라”, “윗옷은 단정해야 한다”는 식의 단서를 달면, 또다시 기존문화는 ‘어쩌라는 것이냐’고 저항할지도 모른다.

여름에 반팔, 반바지를 입자는 구상은 합리적이다. 실제 1970년대 교사와 현장 실무자들 사이에 반바지 출근 풍경도 있었다. 여름 반바지 착용을 둘러싼 합리성과 문화 간 충돌이 있는 가운데, 이제 그 문화를 바꿀 의지가 있다면, 이른바 ‘꼰대’들부터 깨치고 나갈 수 밖에 없다. 책임있는 정책실행자의 모습이다. 솔선수범의 결과가 좋게 나타나면, 고대 그리이스, 중세 유럽에서 남자가 치마를 입어도 어색하지 않았던 것처럼, 반바지 문화도 정착될 수 있을 것이다.

‘긴옷 정장=귀태’라는 등식은 현대사회의 제조물일지도 모른다. 이번 반바지 정책을 성공시킨다면 어쩌면 넥타이-와이셔츠-긴옷 정장으로만 대변되던 ‘남성 패션의 빈곤’을 깰 절호의 기회가 찾아올지도 모른다.

/abc@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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