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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데스크 칼럼 - 김화균> 재계 단체의 의미있는 해외석학 거품 빼기
재계 단체들이 ‘해외 석학 거품빼기’에 나선 것은 1차적으로 엄청난 초청 비용 탓이다. ‘가격 대비 만족도’도 큰 이유다. 이름값이 높다고 강의의 질이 반드시 뛰어난 것이 아니라는 판단이다.


대학 시절 은사 중 한 분인 A 교수. 이 교수는 ‘재방송 교수’라는 별칭을 얻었다. 10년이 넘게 하나의 강의노트를 사용, 매년 같은 내용의 강의를 똑같이 반복했다. 하다못해 강의 내용 중 풀어내는 우스갯소리도 같았다. 과제의 주제도 비슷해 과거 이 강의에서 A학점을 받은 선배의 과제를 살짝 바꿔 제출해도 좋은 학점을 받을 수 있었다. 강의가 끝나면 곧바로 퇴근, 사실상 추가 질문이나 상담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제자가 은사의 험담을 늘어놓는 것은 예의가 아니지만 지금도 A 교수의 강의를 생각하면 본전 생각이 난다. 물론 요즘에는 강의평가 등이 도입돼 A 교수와 같은 행태는 더 이상 설자리를 잃었다고 본다.

대학은 아니지만 이 같은 사례가 한국 땅에서 버젓이 벌어지고 있다. 외환 위기 이후 우리나라에서는 유행병처럼 해외 석학 초청행사가 치러지고 있다. 취지는 좋다. 새로운 경제, 새로운 사고, 혁신의 시대의 힌트를 글로벌 석학들에게서 찾으려는 시도다. 그러나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주제로, 비슷한 행사를 하다보니 ‘강의의 질’이 아닌 모셔오는 해외 석학의 ‘이름값’에서 변별력이 생기는 기현상이 빚어지고 있다. 이러다보니 몸값은 뛰고, 이른바 ‘석학 거품’이란 신조어도 생겼다.

대한상의는 지난주 제주포럼을 열었다. ‘한국판 다보스포럼’을 꿈꾸며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행사다. 당연히 해외 유명 석학이 강사로 나서야 구색이 갖춰진다. 그러나 대한상의는 모 유명 해외 석학의 초청을 추진했다 포기했다. 지나치게 비싼 초청비용 탓이다. 이 석학이 요구한 강연료는 1억원. 여기에 전용 리무진, 원하는 호텔 제공 등 최고급 의전까지 요구했다. 대한상의 한 관계자는 “강연료를 포함해 초청비용 총액을 5000만~6000만원 정도로 깎아줄 수 없느냐고 했더니 아예 연락을 끊었다”고 전했다. 전경련도 상황은 비슷하다. 24일 개막하는 전경련 하계포럼에는 단 1명의 해외 학자만 초청됐다. 그를 제외하고는 무대에 서는 이는 모두 한국 강사다.

재계 단체들이 ‘해외 석학 거품빼기’에 나선 것은 1차적으로 엄청난 초청 비용 탓이다. 웬만한 해외 석학 한 명을 초청하려면 비용이 1억원을 훌쩍 넘어간다. ‘가격 대비 만족도’도 큰 이유다. 이름값이 높다고 강의의 질이 반드시 뛰어난 것이 아니라는 판단이다. 모 재계 단체 고위 관계자는 “몇 년 동안 해외 석학 초청 강연을 해봤는데, 강의 준비가 매우 허술하다는 공통점이 보이더라”면서 “같은 화두를 계속 우려먹는 것을 보고 해외인사 초청 자체에 회의감이 들었다”라고 털어놨다.

이유는 또 있다. 국내 학자들의 강의의 질이 크게 높아진 데 따른 것이다. 제주포럼 단골 참석자인 모 기업 최고경영자(CEO)는 “인문학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국내 유명 인사들의 강의가 아주 인상적이고 실질적인 도움이 됐다”고 평가했다.

한때 미국 외교가에서는 한국 관련 보직을 한 번 맡으면 노후가 보장된다는 얘기가 있었다고 한다. 은퇴 후에도 이곳저곳에 고액 강사로 초빙되곤 했기 때문이다. 사실상 한국이 ‘봉’인 셈이다. 이번 두 재계 단체의 시도가 격식보다는 질과 내용을 추구하는 새로운 포럼 문화를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 

hkim@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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