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 NLL(북방한계선) 논란이 국기가록원 남북대화록 실종사건으로 변형돼 결국 검찰로 넘어갔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NLL 포기발언을 했느냐 말았느냐를 두고 여야가 티격태격하는 것은 뜸해졌지만, 수사 결과에 따라 다시 논란이 불거질 가능성이 크다. NLL은 건재한데, 노 전 대통령은 이미 고인(故人)이 됐는데, 민생이 어려운 데 무슨 소모적 논쟁이 이리 질길까 여길 만하다. 하지만 NLL 논란은 그리 간단치가 않다.
NLL 논란과 꼭 닮은 사건이 17세기 조선을 뒤흔들었던 예송(禮訟) 논쟁이다.
인조의 둘째 아들이자 소현세자의 동생인 효종이 죽고 18대 왕인 현종이 즉위했을 때다. 둘째라도 왕통을 이었으니 적장자라남인의 주장과, 아무리 왕통을 이었어도 둘째는 차남이라는 서인의 주장이 맞붙었다. 겉으로는 허례허식 다툼으로 보이지만 본질은 그렇지 않다. 효종을 장자로 보는 주장은 왕실은 일반 사대부와 다르다는 왕권중심 철학을, 차남으로 보는 주장은 왕실도 일반 사대부와 같다는 신권(臣權)중심 철학을 대변한다.
효종의 장손 숙종은 서인의 영수(領首)인 송시열에 사약을 내리며 예송에 종지부를 찍는다. 서인의 주장이라면 효종은 왕위를 자신의 아들인 현종이 아닌 소현세자의 아들에 물려줬어야 한다. 숙종으로서는 자신의 정통성에 대한 도전이라 여길만 하다. 실제 영조 때 ‘이인좌의 난’은 소현세자의 증손을 옹립해 벌인 사건이다.
그런데 숙종의 증손인 정조는 죄인으로 죽은 송시열을 명예를 회복시켜준다. 정조는 영조의 장남인 효장세자의 아들로 입양된 덕분에 적장자로써 왕위에 올랐다.
공교롭게 대한민국 제18대 박근혜 대통령 때 터진 NLL 논란의 핵심은 노 전 대통령의 발언 자체에 있지 않아 보인다. 참여정부와 민주당은 NLL을 ‘지금은 지켜야하지만 통일이 되면 의미가 없는 선’이라고 여기는 듯 싶다. 반대 입장인 새누리당은 ‘아직 통일이 되지 않은 상황에서의 NLL은 사수(死守)해야 할 영토선’일 뿐이다.
헌법 제69조 대통령 취임선서에는 5가지 임무가 담겨 있다. △헌법준수 △국가보위 △조국의 평화적 통일 △국민의 자유와 복리의 증진 △민족문화의 창달 등이다. 국가보위를 위해 NLL을 사수하는 것과, NLL을 의미없게 만드는 평화통일이 모두 대통령의 임무다. 민주당은 통일을 위해 NLL을 포기한 것은 아니라는, 새누리당은 NLL을 지킨다고 통일하지 말자는 뜻은 아니라는 입장이다. 대통령의 임무를 두고 양대 정당의 입장이 이처럼 다른 데 논란을 잠시 덮는다고 다시 문제가 안 생길리 만무하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는 같은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 두 개의 서로 다른 합리적 의견이 제출될 때 ‘아포리아(aporia)’가 있다고 했다. 오늘날 아포리아는 방치해 둘 수 없는 논리적 난점을 일컫는다. NLL에 대해, 통일에 대해 지금 새누리당과 민주당 간의 대립을 아포리아라 할 만 하다.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는 어떤 원리나 교훈(敎訓)에 대한 간절한 표현을 ‘아포리즘(aphorism)’이라 불렀다. 격언(格言), 경구(警句)다. 지금 아포리아 상태로 격돌한 여야에 필요한 아포리즘은 ‘다르다고 틀린 것은 아니다’가 아닐까.
홍길용 정치팀장/kyhong@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