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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데스크 칼럼 - 전창협> ‘설국열차’ 는 어디로 가는가?
설국열차가 주는 메시지에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이 적잖은 것은 또 다른 우리 사회의 불안요소다. 원작에서 한국 사회가 의미를 찾자면 꼬리칸의 주인이 누구냐가 아니라, 기차는 멈출 수 없다는 대목일 것이다.


“결코 멈추지 않은 열차가 영원한 겨울의 백색세상을 지구 이편에서 저편 끝으로 가로지른다. 바로 1001량의 설국열차다.”

설국열차 원작만화의 첫머리를 보면 설국열차는 영화보다 훨씬 큰 1001량짜리다. 이 영화나 원작만화에 여러 해석이 나오는 것은 기차의 길이가 아니다. 폐쇄된 기차 안에 계층을 나눈 칸막이다.

설국열차가 1000만명 관객을 향해 돌진하고 있다. 개인적 평점은 별 세 개 정도다. 한국 배우의 등장과 설정이 이물처럼 낯설고, 감독의 의도가 어떨지 몰라도 은유가 지나치다는 느낌 때문이다.

원작은 영화보다 어둡고, 차갑고, 비관적이고, 더 깊다. 원작을 보면 설국열차는 선택받는 사람만이 탈 수 있는 ‘황금칸’, 보통사람이 타는 ‘2등칸’, 그리고 짐승칸이라 불러도 될 ‘꼬리칸’으로 나눠져 있다.

황금칸과 꼬리칸은 ‘1 대 99’의 대결처럼 신자유주의 체제 아래 놓인 자본주의의 비판처럼 보이기도 한다. 관람객들 사이에선 황금칸과 꼬리칸이 누구인가를 놓고 여러 말들이 오가고 있다. 온라인 공간에서 구체적인 얘기까지 떠돌며 갑론을박 중이다. 꼬리칸은 민주당 지지자란 얘기부터, 진보정당 지지자, 조선족, 북한사회의 은유란 주장까지 나온다. 계급투쟁의 축소판인 듯 감상평을 남기지만 실제로 영화의 끝을 보면 의미가 없어지는 얘기다.

지난겨울 대선 직후 개봉해 590만명이라는 예상 밖의 흥행을 기록했던 ‘레미제라블’이 겹친다. 영화 끝 무렵 ‘민중의 노랫소리가 들리는가(Do you hear the people sing)?’라는 합창에 가슴이 먹먹했다는 사람들이 많았다. 52% 대 48%로 끝난 대선 뒤 레미제라블이란 말 그대로 스스로를 불쌍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던 이들은 2세기 전 파리의 상황에서 위로를 받았는지 모른다. 혁명을 다룬 듯 보이는 두 편의 영화는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른 메시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쉬운 것은 한국 사람들이 영화를 편히 보지 못하고 스크린에 자신의 심정을 투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선이 끝난 지 여덟 달, 새 대통령이 취임한 지 여섯 달이 지났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대선 연장전을 보는 듯하다. ‘48%’중 일부는 촛불을 들고 있다. 레미제라블에서 동질감을 찾거나 바리케이드 앞 ‘민중의 노랫소리’에서 ‘이번엔 졌지만, 결국은 이길 것’이란 희망을 찾고 있다. 설국열차에서도 자신들의 정체성을 꼬리칸에서 찾거나, 황금칸을 향한 진격에서 희망을 보는 듯하다. 승자 ‘52%’는 패배를 인정치 않으려는 48%를 탓할 뿐, 48%를 껴안으려는 노력은 그다지 보이지 않는다.

레미제라블이나 설국열차가 주는 메시지에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이 적잖은 것은 또 다른 우리 사회의 불안요소다. 영화에는 나오지 않지만 원작에는 설국열차가 실제로 공포에 휩싸여 있는 것은 꼬리칸의 탈주자 때문이 아니다. 밖은 한겨울 백색세상인데, 설국열차는 갈수록 동력을 잃고 느려지고 있다. ‘결코 멈추지 않은 열차’가 멈추는 것은 곧 죽음뿐이기 때문이다. 이즈음 설국열차 원작에서 한국 사회가 의미를 찾자면 꼬리칸의 주인이 누구냐가 아니라, 기차는 멈출 수 없다는 대목일 것이다. 

jljj@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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