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하고 포용력 있는 보수’
포퓰리즘에 영합하지 않으면서
필요땐 좌파정책도 과감히 수용
부드러운 ‘엄마리더십’ 필요한때
앙겔라 메르켈(59) 독일 총리의 3연임 성공은 당장 박근혜에겐 독(毒)이다. 공약의 후퇴, 약속 파기 논란에 휩싸인 최근 박근혜의 모습은 메르켈의 탁월한 여성 지도자로서의 리더십에 대비되기 때문이다. 아버지 박정희는 직선제로 9년을 재임하고 나머지 7년은 체육관선거로 당선된 데 비해 메르켈은 국민이 직접 뽑아 최소한 12년을 통치하게 됐다.
총칼 없이 장기집권에 성공한 메르켈 리더십을 분석하려는 시도가 한창이다. 메르켈 총리보다 두 살 위인 박 대통령도 대선후보 시절이던 2011년 국가미래연구원을 통해 ‘본받을 정치인’으로 탐구하던 지도자 중 한 명이 메르켈이다.
14년지기인 둘은 보수주의자다. 하지만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경우에 한해 야당의 정책도 과감히 수용하는 메르켈의 포용력은 남다르다. 2004년 좌파 여당이던 사회민주당이 저성장 고실업의 경제위기를 타개하고 ‘유럽의 병자’라는 오명을 불식시키기 위해 복지 축소, 고용유연성 확대 등의 정책을 폈다가 이듬해 총선에서 패퇴했음에도 메르켈은 2005년 총리가 된 이후 사민당 정책을 수용해 기업 해고요건 완화, 연금수령자 연령대의 상향조정 등 개혁기조를 유지했다. 야당이 된 사민당이 민심수습 차원에서 노동개혁의 속도를 늦추자고 했지만 “지금 아니면 안된다”면서 거절했다. 포퓰리즘에 영합하지 않는 그의 면모가 엿보인다.
일본 후쿠시마 원전의 위험성이 고조되던 때엔 녹색당의 독일 내 원전 폐기 요구를 과감히 수용했고, 가정복지를 확대하자는 사민당의 제안도 흔쾌히 수락했다. 2010년 초긴축 예산안을 편성하는 과정에서 숱한 반대에 직면했지만, 국민 세부담을 줄이면서도 재계, 노동계, 야당, 연정 내 반대 세력을 차례로 만나 허리띠를 졸라맬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일일이 설득했다. 설득과 실용의 리더십으로 내치에서는 긴축 속 경쟁력 강화 방안을 제시하고, 외치에서는 유로존 재정위기 앞에서 주도국의 책임있는 자세와 함께 세심하고 신중한 EU 경영능력을 보였다는 평가다.
메르켈은 ‘엄마(Mutti) 리더십’으로 불릴 만큼 권위보다는 따뜻함과 설득력을 우선시하고, 포퓰리즘에 몰두하기보다는 원칙을 앞세워 묵묵히 약속을 지키는 지도자로 평가받는다. 지난 2월 최측근으로 불리던 아네테 샤반 교육부 장관이 논문 표절 시비에 휘말리자 즉각 경질한 것에서 그의 단호한 원칙론은 재확인된다.
중도 좌파 성향의 독일 일간지 쥐트도이체차이퉁은 ‘독일인은 돈을 아끼는 슈바벤 지역 주부 스타일의 검소함을 좋아한다’면서 ‘메르켈은 권력을 가진 것을 특별하지 않은 일로 바꿔놓았다. 권력을 과시하지 않지만, 힘을 가졌다’고 호평했다.
‘침묵의 정치’로 지지율을 관리하던 박근혜가 요즘 사면초가다. 대선 핵심 공약이던 기초연금 지급과 4대 중증질환 지원 공약을 수정하고, 검찰개혁과 양극화 해소를 위한 경제민주화 약속이 크게 후퇴하면서 ‘원칙과 신뢰’ ‘개혁적 보수’의 이미지가 퇴색된 것이다. 숱한 이해관계가 충돌해도 휘둘리지 말았어야 했다.
야권과의 협상에서 단 한 가지의 접점도 만들어내지 못한 포용력의 부재 역시 도마에 올랐다. 아버지의 충복에 둘러싸여 성장한 박근혜와 사회의 바닥부터 차근차근 밟으면서 능력을 키운 메르켈의 근본적이 차이점이라는 지적까지 들린다.
메르켈의 3연임이 박근혜에게 주는 교훈은 ‘따뜻하고 포용력 있는 보수’ ‘원칙을 지키는 지도자’로 요약된다. 두 사람이 2000년 처음 만났을 때 박근혜는 “마음이 잘 통하는 것 같다”고 했다. 메르켈의 성공이 현 시점 박근혜의 면모와 대비돼 박 대통령을 더욱 힘들게 할 수도 있지만, 길게 보면 선정(善政)을 향한 충전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abc@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