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영훈 미래사업본부장] “아, 목 좀 축이고 할께요.” 지난 2월13일 독일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 주(州) 데민시에서 열린 정치토론회에서 앙겔라 메르켈(59) 독일 총리는 현안을 두고 지지자와 정치인들 간에 치열한 공방이 벌어지자 큰 글라스에 담긴 맥주를 들이켰다. 공론의 한마당인 ‘재의 수요일’ 행사에서 였다. 1947년 공산권의 코민포름에 대응해 민주주의 국가들이 결성한 데민포름이 ‘데민 정치 토론’을 낳은 모태였다. 이날 모든 정당들이 지지자들과 함께 현안에 대해 열띤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메르켈이 맥주를 들이키는 모습은 민주주의를 제대로 지키려는 그의 열정으로 읽혀졌다.
그런 메르켈 총리가 24일 3연임에 성공했다. 여성지도자이면서 민주주의 원칙을 지키며 남성을 능가하는 경영능력을 인정받은 것이다. 메르켈의 성공은 최근 박근혜의 위기와 대비된다. 작금의 박근혜는 공약의 후퇴, 약속 파기 논란에 휩싸여 ‘국민행복 시대’를 제대로 열지도 못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아버지 박정희는 직선제로 9년을, 나머지 7년은 체육관선거로 당선된데 비해 메르켈은 국민이 직접 뽑아 최소한 12년을 재임하게 됐다.
총칼 없이 장기집권에 성공한 메르켈 리더십을 분석하려는 시도가 한창이다. 메르켈 총리 보다 두 살 위인 박 대통령도 대선 후보시절이던 2011년 국가미래연구원을 통해 ‘본 받을 정치인’으로 탐구하던 지도자 중 한 명이 메르켈이다.
메르켈은 박근혜처럼 보수주의자이다. 하지만 합리적이고 건설적이라 판단되는 경우, 야당의 정책도 과감히 수용하는 포용력은 남 다르다.
2004년 좌파여당이던 사회민주당이 저성장 고실업의 경제위기를 타개하고 ‘유럽의 병자’라는 오명을 불식시키기 위해 복지 축소, 고용유연성 확대 등 정책을 폈다가 이듬해 총선에서 패퇴했음에도, 메르켈은 2005년 총리가 된 이후 사민당 정책을 수용해 기업해고요건 완화, 연금수령자 연령대의 상향조정 등 개혁기조를 유지했다.
야당으로 처지가 바뀐 사민당이 민심수습 차원에서 노동개혁의 속도를 늦추자고 했지만, “지금 아니면 안된다”면서 거절했다. 포퓰리즘에 영합하지 않는 그의 면모가 엿보인다.
일본 동북지역 대지진으로 후쿠시마 원전의 위험성이 고조되던때엔 녹색당의 독일 내 원자력발전소 폐기를 요구를 과감히 수용했고, 가정 복지를 강화하자는 사민당의 제안도 흔쾌히 수락했다. 이번 총선에서 승리하자마자 좌파 사민당에 연정을 타진할 정도다.
2010년 초긴축 예산안을 편성하는 과정에서 숱한 반대에 직면했지만, 국민세부담을 줄이면서도 재계, 노동계, 야당, 연정 내 반대 세력을 차례로 만나 허리띠를 졸라맬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일일이 설득했다.
설득과 실용의 리더십으로, 내치에서는 긴축 속 경쟁력 강화방안을 제시하고, 외치에서는 유로존 재정위기 앞에서 주도국의 책임있는 자세와 함께 세심하고 신중한 EU경영 능력을 보였다는 평가다.
메르켈은 ‘엄마(Mutti) 리더십’으로 불릴 만큼 권위보다는 따뜻함과 설득력을 우선시하고, 포퓰리즘에 몰두하기 보다는 원칙을 앞세워 묵묵히 약속을 지키는 지도자로 평가받는다. 지난 2월 최측근으로 불리던 아네테 샤반 교육부 장관이 박사학위 논문 표절 시비에 휘말리자 즉각 경질한 것에서 그의 단호한 원칙론은 재확인된다.
중도 좌파 성향의 독일 일간지 쥐트도이체 차이퉁은 ‘독일인들은 돈을 아끼는 슈바벤 지역 주부 스타일의 검소함을 좋아한다’면서 ‘메르켈은 권력을 가진 것을 특별하지 않은 일로 바꿔 놓았다. 권력을 과시하지 않지만, 힘을 가졌다’고 호평했다.
유럽 정책 싱크탱크인 ‘오픈 유럽 베를린 연구소’의 미하엘 볼게무스 소장은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메르켈의 위상과 이미지는 정당과 정파를 초월한다. 메르켈은 모든 시민과 이해집단을 배려한다. 동시에 가식이 없고 겸손하다. 독일인들이 그녀의 이런 면을 좋아한다”고 평가했다.
‘침묵의 정치’로 지지율을 관리하던 박근혜가 요즘 사면초가이다. 대선 핵심 공약이던 기초 연금 지급과 4대 중증질환 지원 공약을 수정하고, 검찰개혁, 양극화해소를 위한 경제민주화 약속이 크게 후퇴하면서 ‘원칙과 신뢰’, ‘개혁적 보수’의 이미지가 빈사상태에 이른 것이다.
숱한 이해관계의 충돌과 야당의 공세 등으로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박근혜 스스로 포퓰리즘의 덫에 빠지고, 트레드마크였던 원칙론로 흔들릴 정도로 휘둘리지는 말았어야 했다. 야권과의 협상에서 단 한가지의 접점도 만들어내지 못한 포용력의 부재 역시 도마위에 올랐다. 박근혜는 정치입문 6년만에 당대표에 올랐지만, 메르켈이 총리가 되기까지는 16년이 걸렸다. 아버지의 충복 사이에 둘러싸여 성장한 박근혜와 사회의 바닥부터 차근차근 밟으면서 능력을 키운 메르켈의 근본적이 차이점이라는 지적까지 들린다.
메르켈 3연임이 박근혜에게 주는 교훈은 ‘따뜻하고 포용력있는 보수’, ‘원칙을 지키는 지도자’로 요약된다. 두 사람이 2000년 처음 만났을 때 박근혜는 “마음이 잘 통하는 것 같다”고 했다. 같은 이공계 출신이면서도 14년지기인 박근혜와 메르켈. 메르켈의 모습이 당장은 박근혜의 면모와 대비돼 박대통령을 힘들게 할 수도 있지만, 길게보면 선정(善政)을 향한 충전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침묵보다는 참여로 공론을 파악하고 목이 말라 호프 한 잔 들이키는 대한민국 대통령의 모습을 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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