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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상읽기 - 황해창> 대졸(大卒)과 쪽박
문제는 학력 인플레가 빚은 사회적 불균형이다. 한 쪽엔 사람이 너무 몰리는데 다른 쪽엔 일손이 모자라 난리다. 웬만한 곳은 중국동포들 차지다. 대졸이라는 그놈의 알량한 폼과 체면이늘 탈이다.


간만에 만난 선배 A의 신세타령이 생각보다 길다. 그는 수도권에서 살짝 벗어난 곳, 더 구체적으로는 경부고속도로 주변에 고향을 뒀다. 고등학교까지 시골에서 보내고 대학 진학 이후 40여년을 줄곧 서울에서 살아오고 있다.

그는 아들부잣집 5형제 중 셋째다. 하나같이 큰 말썽 없이 공부도 운동도 썩 잘했다. 남보다 일찍 현대식 농법에 눈을 뜬 아버지는 해마다 땅을 사들였다. 아들들은 일류는 아니어도 척척 대학에 합격했고, 온 동네 칭찬과 부러움을 한 몸에 샀다.

부모는 아들들이 대학에 들어갈 때마나 금쪽같은 논마지기를 흔쾌히 내놓았다. 갈수록 시골 땅이 줄어들어도 그 자체를 낙으로 삼았다. 뜻대로 아들들은 버젓한 직장을 잡았고 결혼해 가정도 꾸렸다.

그런데 그러던 어느 날, 나라 경제가 요동쳤고 기업들이 하나 둘 쓰러져갔다. 길거리에는 실업자가 쏟아졌고 가게들이 줄도산 했다. ‘IMF 외환위기’였다. 그 아수라장에 대기업 간부인 큰형, 은행원인 둘째 형이 휘말려들었고 몇 해 못가 선배도 나가떨어졌다. 남은 건 달랑 공기업 초급간부인 막내 하나.

그러는 사이 고향에도 큰 변화가 있었다. 신도시 개발붐을 타고 땅 값이 치솟았다. 공부가 달려 대학에 못간 동네 친구 B네. 그 집 6남매 중 제대로 대학문턱을 넘은 이는 고작 한둘. 농사에 기술직에 미장원에 뛰어들었다. 돈 들어갈 일보다 돈이 모이자 그 친구 부모는 선배네가 내놓은 땅을 차곡차곡 사들였고 졸지에 돈방석에 앉았다. 관광회사 사장, 인도어 골프연습장 사장, 빌딩 주인 등 한 집안 안에 사장이 서너 명. 이웃 동네에 처가를 둔 덕에 쌍 대박을 터트린 친구도 더러 있단다.

때마침 10일 영국 유력지 파이낸셜타임스(FT)가 한국이 고학력자 과잉으로 무거운 대가를 치르고 있다고 보도했다. 고졸자 10명 중 7명이 대학에 진학해 대졸과잉으로 나라경제가 성장에 방해를 받는다는 내용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대학진학률이 가장 높으며, 매년 5만명의 대졸자가 노동시장에 초과 공급되는 반면 정작 필요한 고졸자는 연간 3만명 이상 부족하다고 꼬집었다.

FT 지적대로 오늘날 한국의 경제부흥은 고등교육의 덕분일 수 있다. 대졸자의 임금이 고졸자에 비해 평균 33% 이상 높은 것도, 대학 졸업장이 인생을 좌지우지해 온 것도 사실이다. 문제는 고학력 사회의 어두운 그림자가 너무 짙어진다는 점이다. 부모 등골 휘게 하는 사교육비는 연간 20조원(2011년 기준)대로 국내총생산(GDP)의 1.63%에 이르고, 복마전인 대학의 등록금은 연간 평균 700만원 선을 훌쩍 넘어섰다. 이러니 가계부채가 1000조원을 육박할 만도 한 것이다.

더 큰 문제는 학력 인플레가 빚은 사회적 불균형이다. 한 쪽엔 사람이 너무 몰리는데 다른 쪽엔 일손이 모자라 난리다. 웬만한 곳은 중국동포들 차지다. 대졸이라는 그놈의 알량한 폼과 체면이 늘 탈이다. 배고픈 것은 참아 내겠는데 배 아픈 것은 참기 어렵더라는 선배, 대학을 괜히 갔단다. 그렇다면 대졸이 곧 쪽박인가. 아무튼 낯설지 않은 이 등식 앞에 초라한 건 우리 둘 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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