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이유를 대든 국가기관의 정치적 중립은 지켜야할 중요한 가치다. 특히 개인이 아닌 조직적 차원에서이뤄졌다면 나라를 흔드는일이다. 정쟁이 아니라 국기문란행위인지를 명명백백히 가릴 문제다.
‘광장’의 숙명이다.
많은 사람의 숱한 이야기가 모이는 광장은 시끄러울 수밖에 없다. 무수히 많은 주장이 제기되고 ‘옳소’, ‘아니오’가 엇갈리고 논쟁은 그칠 줄 모른다. 그렇지만 이 혼란의 와중을 통해 합리적인 합의가 도출된다. 물론 광장 한쪽에선 확인할 도리 없는 은밀한 말들이 유령처럼 떠돈다. 그러면 안 되지만 멱살잡이하는 사람들도 간간이 눈에 띈다. 그러면서 ‘백화제방 백가쟁명(온갖 꽃이 같이 피고 많은 사람이 각기 주장을 펼친다ㆍ百花齊放 百家爭鳴)’속에 민주주의도 꽃핀다.
21세기 광장은 단연코 인터넷이다. 인터넷을 통해 모든 사람이 연결돼 있는 가운데, 블로그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댓글들을 통해 숱한 글들이 유통된다. 고대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에 모일 수 있었던 사람이 몇천명이라면 21세기 아고라엔 한국만 해도 수천만명이 웅성댄다. 공간의 제약이 사라지면서 주장은 급증하고 소통은 빛의 속도다.
하지만 인터넷 공간을 바라보는 시각은 진보와 보수가 차이가 있는 느낌이다. 지난 봄 칼럼(2013년 3월 25일자)에서 언급했듯, 한 조사에 따르면 인터넷은 진보주의자들에게 다소 유리한 것은 사실인 듯하다. 매주 데스톱PC로 인터넷을 이용한다는 사람은 보수는 33.5%지만 진보는 58.3%나 된다. 요즘 들어 일상화되고 있는 휴대전화나 태블릿PC 같은 이동형 단말기는 그 차이가 더욱 벌어져 보수는 28.3%, 진보는 58.8%로 진보성향 이용자가 보수 성향 이용자보다 배 가까이 많다.
댓글이나 SNS에 오가는 글들을 보면서 인터넷을 ‘진보세력의 미디어’처럼 보는 시각이 있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지나치게 오른쪽 성향이라는 평가를 받는 ‘일베’가 논란 속에서도 관심을 끄는 토양이기도 하다. 실제로 정치적인 뉴스에 대한 댓글을 보면 여당보다는 야당의 주장에 동조하는 글이 많아 보인다. 지난번 대선과정에서도 큰 흐름은 마찬가지였다. 보수 쪽에서 본다면 지난 대선에서 인터넷 공간의 ‘그들만의 리그’가 충분히 불편할 수도 있었다. 어쩌면 조급할 수도 있었을 것이란 느낌이다.
‘대선 댓글’ 논란으로 해가 저물고 나라가 들썩이고 있다. 국가정보원에 이어 군사이버사령부의 일부 요원이 정치성향의 글을 올렸다는 폭로가 나오더니, 국정원 요원들이 지난 대선에서 야당후보를 비방하는 트위터 글을 5만건 넘게 올렸다는 야당의 주장으로 떠들썩하다. 야당이 공개한 트위터 글을 보면 명백한 대선 개입에, 수준도 한참 떨어진다. 무슨 이유를 대든 국가기관의 정치적 중립은 지켜야 할 중요한 가치다. 특히 개인이 아닌 조직적 차원에서 이뤄졌다면 나라를 흔드는 일이다. ‘대선 패배 한풀이’라는 주장은 다른 차원의 얘기다. 정쟁이 아니라 국기문란행위인지를 명명백백히 가릴 문제다.
민주주의의 기초는 다양한 목소리의 허용, 그리고 토론을 통한 합의를 이끌어내는 데 있다. ‘백화(百花)’의 주장이 어수선하고, ‘쟁명(爭鳴)’이 시끄럽다해도 이를 인내해야 하는 게 민주주의다.
숱한 사람들이 모인 21세기 광장의 태생적인 숙명을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다.
jljj@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