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영훈 미래사업본부장] 오스트리아의 사상가 스테판 츠바이크는 “역사란 승자를 옳다고 하는 것”이라고 조롱했다. 그는 스코틀랜드 여왕, 프랑스 왕비, 잉글랜드 왕위 계승권자로 행운을 늘 달고 성장했던 메리 스튜어트가 핍박 속에 자라온 엘리자베스 1세에게 말년에 죽임을 당하는 과정을 그리면서, “정치에서 잘못이란 패배자의 몫이요, 역사는 단단한 발걸음으로 패배자들을 넘어가 버린다”고 했다.
츠바이크는 그러나 “죽어야 하는 메리 스튜어트가 느끼는 두려움보다 메리 스튜어트를 죽여야 할 엘리자베스가 느끼는 두려움이 훨씬 컸다”는 역설과 함께 ‘승자의 공포’라는 묘한 여운을 남긴다.
십자군 전쟁이 한창이던 1118년 예루살렘과 팔레스타인 등지의 성지 방어를 위해 결성된 ‘템플기사단’은 최초의 기사(Knights) 수도회였다. ‘성배(聖杯)의 수호자’로 알려진 이들은 유럽지역에서 180년간 봉헌했지만, 템플기사단이 점유한 토지가 탐났던 프랑스왕 필리프 4세가 1307년 그들을 이단으로 몰아 3000여 수도원의 회원들을 체포하고 재산을 몰수했다. 교황청의 승인을 받은 수도회임에도 템플기사단은 결국 해체된다.
‘성전(聖戰)’ 와중에 가장 용맹하고 충직하게 성지를 지켜온 이들은 그후 700년 동안이나 이단으로 몰린 것은 물론 부패자, 동성애자 등의 불명예를 뒤집어써야 했다. 2007년 공개된 당시 이단 재판 기록엔 교황청이 이들에게 무죄를 선고했던 것으로 드러난다. 교회분열을 막는다는 이유로 700년간 기록 공개를 막는 바람에 그들과 가족, 후손의 고통은 물론 교회도 정치의 오물을 뒤집어쓰는 봉변을 당했다. 반대로 파렴치범 필리프 4세는 떵떵거리면 잘 먹고 잘살다 죽은 지 650년 넘게 욕을 먹지 않았다. 필리프 4세를 향한 분노조차 남아있지 않은 21세기이다.
16세기 ‘태양을 중심으로 지구가 돈다’면서 지동설을 주장했다가 교회의 탄핵을 받은 코페르니쿠스가 21세기에 복권되기까지 걸린 500년간, 과학은 ‘천동설'이라는 오도된 믿음에 가려 신음해야 했다.
‘신곡’을 쓴 단테의 명예회복은 특이하다. 피렌체 독립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1302년 시의회로부터 벌금형과 추방형을 선고받고 고향 이외의 지역에서만 ‘화려한’ 떠돌이 생활을 했다. 시의회는 그로부터 706년 만인 2008년 6월 단테에 대한 형벌을 철회했고, 시장은 “단테에게 피렌체 최고의 영예를 주겠다”고까지 했다. 사면을 넘어 칭송으로 역전됐다. 중세 르네상스를 열었던 단테가 ‘승자’였기 때문은 아닐까.
조선 세조 때 죽은 단종과 사육신은 200년 뒤인 숙종 때 사면복권됐고, 죽산 조봉암은 이승만에 의해 간첩 혐의를 뒤집어쓰고 사형당한 지 52년 만에 후손의 재심청구 끝에 무죄를 선고받았다. 조봉암 사후 50여년간 수천만 국민이 ‘승자의 사실 왜곡’ 때문에 그를 간첩으로 오인했던 점은 우리를 안타깝게 한다.
이달 초 유신시절 긴급조치 위반사건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받은 이재오 새누리당 의원은 “권력이 정의롭지 못하면 국가가 불행해지고 개인의 가치관이나 행복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일갈했다.
20일 친일, 극우 논란에 휩싸였던 교학사를 비롯해 역사교과서 8종이 무더기로 수정 보완 권고를 받았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그 ‘색깔’에 맞춰 첨삭했다는 의혹이 짙다.
“역사가 되풀이된다면 인간은 얼마나 경험에서 배울 줄 모르는 존재인가”라던 조지 버나드 쇼가 한국 역사책의 끊임없는 ‘냉탕온탕’ 변신과정을 보면서 조롱하는 듯하다.
‘승자의 공포’는 역사가 나를 어떻게 볼까 두려워하는 것이고, 그 두려움은 흔히 조바심으로 이어질 수 있다. 엘리자베스는 ‘승자의 공포’를 극복했기에 성군이 될 수 있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역사책 정국’에 관한 한, 실체적 사실(史實)에 근거해 일관성 있고 균형 잡힌 교과서 저술 환경을 조성해주는 일은 집권세력의 조바심과 두려움을 떨쳐낼 유일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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